비누에 대하여 /이영광 作
비누칠을 하다 보면
함부로 움켜쥐고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누는 조그맣고 부드러워
한 손에 잡히지만
아귀힘을 빠져나가면서
부서지지 않으면서
더러워진 나의 몸을 씻어준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한다
힘을 주면 더욱 미끄러워져
나를 벗어나는 그대
나는 그대를 움켜쥐려 했고
그대는 조심조심 나를 벗어났지
그대 잃은 슬픔 깨닫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지
끝내 으스러지지 않고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비누처럼, 강인하게
한번도 나의 소유가 된 적 없는데
내 곁에 늘 있는 그대
나를 깊이 사랑해주는
미끌미끌한 그대
<2003>
이영광 시인(1965년생)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98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함께 읽기> 난 머리 감을 때 샴푸와 린스를 전혀 쓰지 않는다. 샤워할 때 바디클렌전지 뭔지 하는 제품 역시 아내의 전용품 일뿐, 세수하고, 머리 감고, 샤워할 때도 오직 비누 한 가지만 사용한다. 한데 비누를 사용할 때마다 미끌미끌하여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뜨리기 일수다. 특히 세게 쥐면 쥘수록 나를 따돌리며 멀어져간다.
나는 고작 손에서 빠져나가는 비누의 미끌미끌함에 짜증을 낼 뿐이건만 시인의 눈은 역시 다르다. 비누를 '헤어진 연인'에 비유하는 저 기발함과 참신함을.
"비누는 조그맣고 부드러워 / 한 손에 잡히지만 / 아귀힘을 빠져나가면서 / 부서지지 않으면서 / 더러워진 나의 몸을 씻어준다" 한 손에 담겨 조금 힘만 줘도 단번에 으스러질 것만 같은 연하디연한 비누, 힘을 세게 주면 줄수록 쉬 미끄러 빠져 나간다.
그러나 조그맣고 부드러운 비누는 더러워진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준다. 나의 폭력(?)에도 불구, 나를 일깨워준다. "힘을 주면 더욱 미끄러워져 / 나를 벗어나는 그대 / 나는 그대를 움켜쥐려 했고 / 그대는 조심조심 나를 벗어났지" 비누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나 또한 그를 사랑했기에 소유하려(움켜쥐러) 했다. 그게 참사랑의 길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괜한 집착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집착을 버림이 소유에 더 접근할 수 있음을 몰랐던 게다. "한번도 나의 소유가 된 적 없는데 / 내 곁에 늘 있는 그대 / 나를 깊이 사랑해주는 / 미끌미끌한 그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으스러질까 봐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 어디 비누뿐이겠는가. 내 손아귀에 거머쥐고도 내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수 많은 존재들. 인간 또한 물 묻은 비누처럼 미끌미끌하다 하겠다. 꽉 쥐려하면 멀어지기 마련이니까. 작금의 정치인들이 직시해야 할 대목이다. 국민을 손아귀에 넣으려 힘주면 민심이 바닥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