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옷을 겹쳐 입었다. 장성호를 걷기 위해서다.
날씨가 추워져 북쪽에서는 눈이 내린다고 한다.
“장성호를 눈 내리는 아침에 걷는다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에 만나는 물결의 잔잔함, 스산함이 좋다.
인적이 드문 장성호를 걷는다. 신갈나무에 나뭇잎 몇 개가 대롱대롱 달려 있다. 훌러덩 벗은 나무의 잔가지 사이로 새순이 몸을 움츠렸다. 봄이 오기까지 바람과 추위를 이기며 자신을 지켜내는 겨울나무에 박수를 보낸다.
12월이다. 나눌 것 없는 내 곳간에도 하나 둘씩 마음의 양식이 쌓여가는 것을 느끼며 길을 걷는다.
일주일간 스트레스로 가득 찬 내 영혼을 털기 위해 길을 나선 아침에 적당히 차가운 청량감이 좋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다.
“김치 가지러 오세요.” S언니의 전화다. S언니는 일 년 동안의 고생했던 곡식을 털어서 주변인에게 나누어 준다. 배추도 항암배추를 심었다. 노란속이 찬 배추를 뽑는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텃밭에서 배추를 뽑아 꽉 찬 배추를 칼로 나누어 보니 기쁨이 두 배로 다가 왔다.
시골 너른 마당에 배추를 옮기고 간을 했더니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몇 해 전 신안에서 온 굶은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밤새 잠을 재운 배추는 간이 잘 스며들었다.
이번 김치는 맛나게 담그기 위해서 지리산에서 물도 공수해 왔다.
S언니 시골집에 도착하니 너른 마당에 물기 빠진 배추가 가득 올려 있다. 마을 아낙들이 미리 버무려 놓은 김치를 척 걸쳐 올려 보쌈을 먹고 있다. 군침을 올라 손도 씻을 겨를 없이 보쌈 한입을 먹는다.
김치담기가 시작되었다. 김치를 담그며 서로들 오가는 이야기들은 “올해는 비가 많이 와 고추 값이 비싸다”는 등 “곡성댁 아들이 돈을 벌어 부모님 김치냉장고 사드렸다.” “하동댁 딸은 이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어.”등 김치를 담그며 오가는 이야기가 재미가 있다.
김장철을 맞이하면서 ‘김장 문화’의 유네스코 등재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조도혜 생활문화 기자에 의하면, 김장 문화는 지난 2013년 12월 5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 8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는 김치를 인류무형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음식 자체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김치를 담가 먹는 김장문화를 후보에 올렸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김장을 통해 이웃 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국의 김장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한 명칭은 김장, 한국에서의 김치 만들기, 나누기다. 김장문화는 마을 공동체가 함께 한다. 품앗이 문화를 이어가는 김치 담그기는 대가족제도에서 이루어졌던 문화풍습이다.
요즘은 핵가족화로 대용량 김치는 담가 먹지 않지만 근대문화가 남아 있는 시골 문화는 김치 담그기에 공동체가 함께 한다. 너른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너도나도 맛깔난 이야기 한 사발 나누며 김치 담그기를 하다보면 김장이 끝이 났다.
김장이 끝나면 여기서 문화는 멈추지 않는다. 수육과 막걸리가 쟁반에 나오고 붉게 물이 든 배추김치에 깨가 송송이 뿌려진 김치를 나누어 먹으며 노곤함을 푼다. 집집마다 김장문화에 대한 스토리를 더 하자면 날이 샌다.
S언니는 김치는 끝나지 않았다. 배추김치와 돌산 갓 김치를 홀로 되신 마을 어른들 집에 돌리고 나니 오전에 일이 끝이 났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 겸 누웠더니 인기척이 들려온다. 정성이 담긴 김치 맛을 보니 빈 그릇을 보낼 수 없었다는 옆집 금곡 댁은 팥죽을 끊여 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받는 S언니의 얼굴이 웃음꽃이 피어난다.
우리나의 나눔은 빈 그릇이 돌아오지 정이 있는 나눔이다. 나눔을 실천하며 함께 하는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 김치 담그기는 11월 말에서 12월 초 대한민국 문화에서 뺄 수 없는 문화이다.
나눔의 정성이 정으로 흘러 사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미덕, 바로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다.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김장문화가 아직도 살아남아 있기에 나눔은 아름다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국의 김장문화는 “고맙습니다.” 이다. 나누어서 고맙고 받아서 고맙다. “김치 가지러 와.”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면 이 말을 기다린다. 그 정을 퍼 담으로 올해도 김치 통을 들고 시골로 달려간다. S언니의 1년 동안의 고생과 정을 푹 담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