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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간(內間)
  • 호남매일
  • 등록 2020-1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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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부인(內部人)을 활용하는 간첩술

/이정랑 중국고전평론가


내간(內間)은 ‘손자병법’ 「용간편」에 나오는 ‘5간(五間)’ 중의 하나다. 손자는 여기서 “내간이란 적국의 관민들을 첩자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적국의 관리나 백성들을 매수해서 간첩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적 진영에 어떤 사람이 있든 간에 자기 쪽 간첩으로 만들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두목(杜牧)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고 있다.


적의 관리 중에는 현명하지만 실직한 자, 잘못을 범해 벌을 받은 자, 총애를 받으면서 재물을 탐내는 자, 굴욕을 참으며 낮은 자리에 있는 자, 자리를 못 얻은 자, 한때 낭패를 당했으나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려는 야심을 가진 자, 늘 바뀔 수 있는 극단적인 이중인격자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관리들은 모두 은밀한 접촉을 통해, 돈 따위로 매수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그 나라의 전세를 파악하고, 우리 쪽에 대해 무슨 일을 꾀하는지 살핀 다음, 다시 그 군신을 이간시켜 불화를 일으키도록 한다.


적의 내부 모순이나 일부 인사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용해서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진양(晉陽)에 있을 때 흉노왕 묵특(冒頓)이 대곡(代谷)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격을 가하려고 생각했다.


묵특은 유방을 유인하기 위해 정예군과 살찐, 소와 말을 감추어둔 채, 나약하고 비쩍 마른 병사와 가축만을 전시했다. 유방은 전후 10여 차례 묵특 진영을 정찰한 결과 공격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기원전 200년, 유방은 몸소 32만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묵특의 40만 정예병에 의해 백등산(白登山.-지금의 산서성 대동 동쪽)에서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곤경에 빠진 유방은 진평(陳平)의 꾀를 받아들여, 묵특의 아내 알씨(閼氏)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 포위를 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한의 사신이 보내온 번쩍이는 금은보화를 보자 알씨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때를 놓칠세라 한의 사신은 미인도 한 폭을 내보이면서 알씨의 심기를 건드렸다.


“중원의 황제께서는 대왕께서 군대를 돌리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이 되셔서 중원의 제일가는 미인을 대왕께 바치려 하십니다. 그래서 이 미인도를 먼저 대왕께 보여드리고자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알씨는 속으로 흠칫 놀라며 황급히 그것은 필요 없다면서, 자신이 곧 선우(單于.-흉노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로 ‘왕’이나 ‘천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에게 말해 철수시키겠노라 약속했다.


그날 밤 알씨는 묵특에게 왕황(王黃)과 조리(趙利)의 군대가 오기로 약속했는데 아직 오지 않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이 말에 묵특은 그 두 사람이 한나라군과 내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포위망 한쪽을 트도록 명령했다. 유방은 그 틈에 서둘러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977년, 미국 카터 대통령의 비밀 특별조사위원회(중앙 정보국 CIA의 비밀 활동을 감사하는 백악관 팀)는 아주 맥 빠지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CIA에서 크렘린궁에 심어놓은 암호명 ‘두더지’라는 고급 간첩이 소련 정보기관 KGB에 체포되어 ‘내란죄’로 사형당했다는 것이었다.


‘두더지’는 필라토프라는 이름의 소련 외교관이었다. 1976년, 그는 소련 주재 알제리아 대사관에서 수행원으로 일하던 중 미국 챰의 미인계에 걸려들어 CIA의 ‘내간’이 된 인물이었다. 그 뒤 필라토프는 모스크바 외교부에서 일하면서, 미국 CIA에서 제공하는 간첩 활동에 필요한 장비로 본격적인 첩보 공작을 시작했다.


1962년 미국이 소련 내부에 심어놓은 ‘두더지’ 판케브스키가 모스크바에서 체포된 이후로, 필라토프는 미국이 소련 내에서 고급 기밀 정보와 잡촉 할 수 있는 유일한 간첩이었다.


CIA가 심어놓은 간첩들이 어째서 소련 내부에서 거듭 실패를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CIA 내부에서 격렬하고 상호 공격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KGB가 CIA 내부에 그들의 ‘내부 라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켜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1963년에 CIA 반정보처 차장 제임스 엔젤톤은 내부 감사를 실시, 네 명의 용의자를 색출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으로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자, 아예 CIA 소련 담당 부서가 대단히 민감한 정보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976년에 입각한 신임 CIA 국장 제임스 컬비는 또 다른 쪽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두더지’의 체포가 KGB의 정상적인 첩보 수집 과정에서 얻은 것이거나 아니면 미 정보기관의 실책 내지는 불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컬비는 ‘두더지’ 때문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 사기가 떨어지고 정신이 분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엔젤톤을 해임 시켜버렸다. 그렇다고 논쟁이 결말 지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77년 KGB가 또 한 번 ‘두더지’ 필라토프를 찾아내자, CIA의 많은 반정보 요원들은 다시, 한 번 ‘두더지’의 체포가 자기 기관 내부에 숨어 있는 KGB 끄나풀의 소행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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