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류시화의 ‘눈 위에 쓰는 겨울시’ 1월에 만나본다.
광주 북구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함박눈이 내린다고 한다. “눈이 내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 어떤 언어로 표현할까? 고민하면서 소복 소복이라는 말이 적당한 것 같아.”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광주의 남구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서해안에서 시작된 눈바람이 장성쪽으로 많이 내린다고 했는데 장성과 가까운 북구에 눈이 펑펑 내리나 보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만나려면 어떻게 할까? 장성과 가장 가까운 백양사로 차를 몰았다. 백양사 산사에는 벌써 많은 시들이 씌어져 있다. 백양사 절 들어가기 입구에 커다란 눈사람이 반갑게 인사한다.
찻집 처마 아래에는 여섯 마리의 오리가 소풍을 가고 있다.
하얀 눈이 쌓인 백양사에서 나만의 겨울시를 써 본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이야기는 가슴에 담아두었다. 하얀 눈이 내리는 산사에서 겨울 시를 써본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 위에 시를 쓰고 싶다./ 눈이 날리면/ 언어는 어디로 날아갈까?/ 바람에 날리다 지치면 들판에 살짝 내려앉고/ 가다가 힘들면 지붕에 떡 가루를 뿌려 놓고/ 눈이 내리는 날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날/ 나뭇가지에 쌓인 하얀 용, 용트림을 준비한다.’ 눈이 내리는 날 시인이 되어 바람결에 날려 보낸다.
류시화의 시는 마음이 아리다. 녹아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그러나 흔적은 사라지겠지만 기억의 한편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백양사 산사에 서서 아름다운 시절로 가 본다. 30년 전 그날도 펑펑 눈이 내렸다. 하오 3시쯤 백양사행 버스를 탔다. 한 시간이나 걸려 백양사에 도착해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산사를 친구와 무작정 걸었다.
백양사 종점 버스에서 내릴 때 차장은 막차가 5시 30분이라고 했다. 어둠이 내리자 백양사 버스 정류소로 달렸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함박눈이 어둠을 덮었다.
30년 전 눈 내리는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검정색 코트를 입고 친구와 걸었던 백양사 산사의 겨울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본다. 눈이 내리는 날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백양사에서 눈 위에 쓰는 시는 백양사를 찾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다. 눈이 많이 내려 눈 오리를 만들어 토방 위에 줄을 세워 올려놓았다. 엄마 오리 없이 아기 오리들이 백양사 찻집 처마 밑에 소풍 갈 준비를 한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귀엽다. 햇살이 들기 전 물속으로 가야 할 텐데…
일곱 마리 아기 오리들 엄마를 기다리나보다. ‘아기오리소풍’ 노랫말이 생각난다. “엄마 오리가 소풍을 간다. 뒤뚱 뒤뚱 울타리를 지나서 언덕을 넘어서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간다네.” 눈 내린 백양사 산사 찻집 처마 밑에 어느 나그네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갔을까? 아기 오리들 뒤뚱뒤뚱 겨울 소풍을 간다.
눈이 내리는 날, 눈 위에 많은 시를 남겨 놓았다. 어떤 이는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밀짚모자까지 덮어 놓았다.
지난밤 산사에 내린 눈은 하얀 백설기 떡을 세 판이나 쪄서 돌상에 올려놓았다. 백양사 처마에는 고드름이 젓가락이 되어 춤을 춘다. 지붕위에서 눈이 녹아 곧게 흘러 내려 고드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산사를 자꾸 바라보게 한다.
올 겨울은 눈 위에 시를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일기예보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한다.
서울에 사는 벗은 아기 눈사람 두 개를 만들어 베란다 위에 올려놓았다는 시를 써서 보내왔다. 작은 당근으로 코, 검정 천을 이용해 눈썹까지 만든 귀여운 눈사람 덕에 많이 웃었다. 경주에 사는 벗은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시를 쓸 수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에 누군가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군가는 노트북에서 시를 쓰고, 누군가는 마음속에 시를 남긴다. 코로나 19로 펜데닉 상황이 지속 되는 시기에 눈으로 오리도 만들어 보고, 눈사람도 만들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올 겨울에 눈 위에 쓰는 시는 위대한 시다. 어려웠던 삶은 하얀 눈 세상으로 덮고, 아이들의 아기 오리 만들기는 예쁜 기억의 시로 남을 것이다. 눈 위에 시를 쓴다. 따뜻한 사람, 그리운 사람, 정다운 이야기가 새록새록 스며나는 시를 눈 위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