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고전평론가
벼슬을 미끼로 한 간첩술 ‘작간’(爵間)은 ‘병경백자’ 「간자」에서 열거한 16가지 ‘용간법’ 중의 하나다.
벼슬이나 높은 지위를 미끼로 적진 사람들을 유혹 나를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기’ 「오자서열전 伍子胥列傳」에 실려 있는 경우를 보자.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송나라로 도망갔는데, 마침 송나라 화씨(華氏) 대신이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태자 건(建)과 함께 정나라로 도망갔다. 정나라에서는 그를 매우 잘 대해주었으나, 태자 건은 정을 떠나 진(晉)으로 갔다. 진 경공(頃公)은 태자 건에게 말했다.
“태자는 정나라 군신들과 관계가 좋고 정나라도 태자를 신임하지요. 태자가 우리 진나라를 위해 정나라 안에서 내응해 준다면, 내가 대군을 이끌고 정을 공격하여 정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오. 정나라를 멸망시킨 후 큰 벼슬과 함께 그 나라를 태자에게 넘겨주겠소.”
태자 건은 경공의 계획에 동의하고 다시 정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태자 건을 수행하던 자가 이 사실을 정나라 정공(定公)에게 일러바쳤다. 정공과 정자산은 태자 건을 잡아 죽여버렸다.
이 이야기에서 진은 벼슬과 지위를 미끼로 태자 건을 꼬드겨 정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고, 태자 건도 벼슬이라는 미끼 때문에 간첩을 자청했다. 그러나 철저하고 비밀스럽게 일을 추진하지 못하는 바람에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치밀하게 보안을 유지하면 성공하고, 비밀이 새어 나아가면 실패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증명해주고 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적이 먼저 알아채면 예상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림을 활용한 간첩술 ‘화간’(畵間)이란 그림을 이용해서 간첩 활동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유방이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의 대군에게 포위당하자 진평(陳平)이 미녀도(美女圖)를 흉노의 선우인 묵특의 아내 알씨에게 보내 포위를 풀도록 한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송나라를 세운 후,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전국을 통일하기 위해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는 정권을 점진적으로, 소멸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남당(南唐)의 후주(後主) 이황(李煌)은 몹시 겁을 먹었다.
강남에서의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송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스스로 남당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강남 국주로 깎아내리겠다고 자청하면서 복종을 맹세했다. 송 태조는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여 남당과의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 데 일단 동의했다.
남당의 대신들 가운데 임인조(林仁肇)는 송이 차지한 강북 땅을 수복하고 싶어 했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비장한 건의를 올렸다.
“회남(淮南.-지금의 강소성 양주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송의 군대는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게다가 후촉(後蜀)을 멸망시키고 지금은 남한(南漢)을 탈취하느라 몹시 지쳐 있을 것입니다. 신은 수만 병력으로 강북의 옛 땅을 수복하고 싶습니다. 출병하는 날 왕께서는 제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언하여 송나라 쪽에 알리십시오. 이것이 성공하면 우리나라의 이익이 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반란을 명분으로 신의 전 가족을 몰살시키면 송을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황은 송과 남당의 힘을 가늠해본 다음 임인조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송 태조는 임인조에게 원한을 품게 되어, 남당을 멸망시키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인 임인조를 제거하기로 결심 했다. 972년, 송 태조는 남당으로 사람을 보내 임인조의 부하를 매수하여 임인조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훔쳐내게 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다른 사신을 대접하는 집에다 걸어놓고, 남당의 사신을 불러 보여 주었다. 송의 간첩은 그림을 가리키면서 사신에게 물었다. “누군 줄 아시오?”
사신은 임인조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간첩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임인조가 장차 투항하려는 뜻을 전하면서, 우선 이 그림을 신표로 보낸 것이오.”
이어서 간첩은 비어 있는 공관 건물 한 채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 공관은 임인조를 위해 마련해놓은 것이지요.”
사신의 보고를 받은 이황은 임인조를 독살시켜버렸다. 그로부터 3년 후, 송은 남당을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