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여자를 이용한 간첩술인 여간(女間)은 ‘병경백자’ 「간자」에 나오는 16가지 간첩 활용법의 하나다.
이 방법은 미녀를 이용하여 적의 정세를 염탐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미인계’가 월나라 왕이 서시에게 빠진 경우처럼 여자의 미색으로 적을 마비시키거나 투지를 꺾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에 ‘여간’은 미녀를 이용해서 정보를 얻는 데 중점을 둔다.
현대 사회의 정치·경제·군사·외교 무대에서 ‘미인계’는 일반적으로 이 두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미인계’ 참조)
편지를 이용한 간첩술인 서간(書間)은 편지나 각종 문서 등 글로 된 자료를 이용하여 적 상호 간의 시기심을 조장하는 방법이다.
남북조시대(420~589년) 동위(東魏)의 대장 단침(丹琛)은 양주자사(陽州刺史) 우도항(牛道恒)을 파견하여 서위를 공격하게 했다.
538년, 서위의 위효관(偉孝寬)은 간첩을 동위 진영 깊숙이 침투시켜 비밀리에 우도항의 필적과 도장 등을 이부한 다음, 필적을 잘 흉내 내는 사람을 구해 우도항의 이름으로 위효관 자신에게로 우호적인 편지를 쓰게 하고 도장을 잘 파는 사람에게 우도항의 도장 모양대로 도장을 파게 해서 편지 위에 찍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일부러 불에 태우고 타다 남은 조각을 단침의 막사 입구에 떨어 뜨러 놓게 했다.
이 편지를 본 단침은 우도항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의 계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위효관은 상대 진영의 마음이 서로 벌어진 틈을 타서 공격을 단행하여 단침과 우도항을 사로잡았다.
788년, 토번(吐番)이 10만 대군으로 당나라의 사천 서부 지역을 침략했다. 동시에 운남왕(雲南王)을 함께 출병하도록 협박했다.
당시 운남왕은 이미 당나라에 귀순하겠다고 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감히 토번을 거스르기도 힘들어 수만 명을 노수(瀘水.-지금의 사천성 아룡강 하류) 북쪽에 주둔시켜놓고, 한편으로 관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토번과 함께 작전을 펼칠 준비를 했다.
사천을 지키고 있던 당나라의 장수 위고는 머뭇거리고 있는 운남왕의 이런 심리상태를 탐지하고, 토번과 운남왕의 연맹을 분열 와해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운남왕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운남왕이 토번을 배반하고 당 왕조에 귀순한 성의를 한껏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은으로 된 상자에 넣어 토번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록 안배했다. 토번왕은 이 편지를 보자 운남왕을 증오하게 되었고, 급기야 2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여 운남에서 사천에 이르는 요로를 통제하게 했다.
운남왕은 크게 화가 나 토번 지원에 나선 병마를 모두 철수시키고, 당 왕조로의 귀순 결심을 더욱, 굳혔다. 운남의 원조를 잃은 토번은 그 위력이 반감되어 여러 차례 위고에게 패했다.
적의 가요를 활용하는 간첩술인 가간(歌間)은 ‘병경백자’ 「간자」에서 말하는 ‘용간법’ 중의 하나다. 그 실시 방법은 음악이나 노래를 이용하여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적군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기원전 203년 12월, 초(楚)나라 10만 군대는 해하에서 포위당했다. 한신(韓信)이 이끄는 30만 한(漢)나라 군대가 겹겹이 초나라 군을 포위했고, 한신은 초군을 철저히 궤멸시키기 위해 한나라 군사들로 하여 밤에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 노랫가락은 초나라 군사들에게 빨리 항복하라고 권하는 것 같았고, 그 가사는 마치 슬프고 슬프게 울부짖는 것 같았다.
강동 지방 출신의 8천 명에 이르는 젊은 병사들은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았다.
집 떠나온 지 10여 년,
부모와 생이별하고, 아내는 홀로 쓸쓸한 방을 어떻게 지키고 있을까?
이 노래를 들은 항우(項羽)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유방(劉邦)이 이미 서초(西楚)를 손에 넣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이 저렇게도 많단 말인가?”
초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싸움에 실증이, 나 있던 군사들은 속속 도망갔다.
심지어는 항우를 오랫동안 보좌한 측근 장수들마저 말 한 마디 없이 곁을 떠났고, 숙부인 항백(項伯)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항우는 초나라 의 처량한 노래를 들으며 목숨을 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