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 고전 연구가
‘해간(孩間)’이란 아이를 이용해 간첩 활동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232년, 연나라는 태자 단(丹)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나라는 장당(張唐)을 연나라에 보내 상국 자리를 맡게 해서 두 나라가 공동으로 조나라 공격을 준비하게 했다.
연으로 떠나기에 앞서 장당은 진나라 재상 여불위(呂不韋)에게 일찍이 자신이 조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조나라가 자신을 몹시 저주하여 누구든 자기를 잡는 사람에게 백 리의 땅을 주겠다는 현상금까지 걸었다면서, “이번에 연나라로 가려면 조나라를 거쳐야 하는데 나는 죽기 싫소”라며 연나라 행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일이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여불위의 가신들 중 감라(甘羅)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진나라의 재상 감무(甘茂)의 손자였다. 이 감라가 자기가 장당을 설득해보겠노라며 나섰다.
여불위는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꾸짖듯 말했다.
“물러가라! 내가 명령해도 듣지 않는데, 네까짓 것이 무슨 수로 설득한단 말이냐?”
그러자 감라는 당돌하게 말했다.
“항탁은 일곱 살 때 이미 공자의 선생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벌써 열두 살이 넘었습니다. 어째서 저를 시험해보실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무라십니까?”
여불위는 감라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감라는 장당을 찾아가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 하면서 이해관계를 밝혀, 결국 장당으로 하여금 연나라 행을 승낙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장당이 떠나기 며칠 전, 감라는 여불위에게 자신에게 수레 다섯 량을 주면 먼저 조나라를 다녀오겠노라고 요청했다.
여불위는 진나라 왕 영정(뒷날의 진시황)에게 요청해 감라를 사신으로 임명, 조나라로 보냈다.
조나라 왕은 몸소 성 밖 근교까지 나와 감라를 맞이했다. 감라가 조왕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연나라 태자 단이 전에 인질로 간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들어서 알고 있다는 조왕의 대답에 감라가 다시 물었다. “그럼 장당이 연나라로 가서 재상이 된다는 얘기도 들으셨겠네요?”
조왕 역시 그렇다고 대답하자 감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과 연이 연맹 관계를 맺는 목적은 조나라를 치기 위함이니 조나라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진나라에 5개 성을 할양해서 진나라로 하여금 연나라 태자 단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조나라는 다시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조왕은 감라의 말에 동의했다.
조나라는 다섯 성을 진에 떼어준 후 연의 30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중 11개의 성을 진나라에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진나라는 힘 하나 안 들이고 앉아서 조나라 다섯 개 성과 연나라 11개의 성을 차지했다.
‘승간(僧間)’이란 승려(僧侶)를 이용하여 간첩 활동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남당(南唐)의 후주 이황(李煌)은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한 인물이었다. 송나라 태종은 남당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황이 불교를 신봉한다는 특성을 이용하여 승려를 남당에 보내 간첩 활동을 벌이게 했다.
어느 날 북방에서 한 승려가 남당으로 왔다. 사람들은 그를 ‘소장로(小長老)’라 불렀다.
이황은 소문이 자자한 이 ‘소장로’를 불렀고, 소장로는 이황에게 절을 짓고 탑을 세워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보살펴달라고 기원하라고 권했다. 이것은 사실 남당의 국력을 소모케 하자는 속셈이었다.
소장로는 이황의 허락을 얻어 남당의 수도 금릉(金陵) 서남쪽에 자리 잡은 우두산(牛頭山) 위에 무려 1천여 칸짜리 절을 세웠다.
그리고 1천여 명의 승려들을 소집해서 매일 법회를 가지면서 엄청난 음식을 장만한 다음 남은 음식물을 산과 들에 부리게 하면서, 승려들과 음식물을 얻으러 온 백성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려 인심을 동요시켰다. 이황의 전폭적인 지원에서 소장로의 불사(佛事)는 날이 갈수록 번창해졌다.
975년, 송나라 대군이 남당을 공격했다. 송의 군대는 장강을 건너 금릉을 압박하면서 우두산의 절을 주둔 기지로 이용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승려가 장강을 건너 남쪽 기슭의 채석기(採石磯-지금의 안휘성 당도현)에 이르러 벽돌로 탑을 세웠다. 이 승려는 늘 풀로 엮은 누더기 옷에 채소를 먹고 살면서, 이황과 남당 사람이 보내온 음식이나 물건을 결코, 받지 않았다.
그 뒤 송의 군대가 남당에 진군하면서 뜬 다리를 놓아 장강을 넌넜는데, 이 다리의 한쪽 끝은 두 번째 승려가 쌓은 돌탑과 연결되었다. 이 두 승려는 송에서 보낸 간첩, 즉 ‘승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