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적과 싸울 때 강 가까이 진을 치고, 아군이 근공 하려면 반대로 나타내기를 멀리한다. 반드시 많은 의병을 설치, 상하 멀리서 강을 건너면, 적은 반드시 병력을 나누어 응전해 온다. 아군이 은닉한 부대(潛師)로 이를 가까이서 치면 적군을 깨뜨릴 수 있다.
병법에 이르기를 ‘가까이서 멀리를 나타낸다.’라고. 즉 근거리에 있는 적을 격파하고자 하면서, 원거리에 있는 적을 먼저 격파하는 것처럼 보이게(기만) 한다는 뜻이다.
‘원이시근(遠而示近)’과 상대되는 이 계략 역시 ‘손자병법’ 「계편 計篇」이 그 출전이다. ‘가까운 곳에서 진군해오면서 먼 곳에서 진군하는 것처럼 꾸민다.’ ‘백전기법’ ‘근전(近戰’에서는 “가까운 곳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먼 곳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여 적이 먼 곳을 대비할 때 가까운 곳을 기습한다.”고 했다. 이 계략은 ‘원이시근’과 같이 진공 노선·주공격 방향·공격 지점을 은폐하는 계략에 속한다. 본래는 거리가 매우 가깝지만 먼 곳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는 곧장 공격할 계획이지만 조건이 아직 무르익지 않아 장차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성동격서(聲東擊西)’나 ‘명수잔도(明修殘道), 암도진창(暗渡陳倉)’ 등이 모두 ‘근이시원’을 포함하고 있는 용병 사상들이다.
‘자치통감’ ‘진기(晉紀’에 실린 경우를 살펴보자. 392년, 후연(後燕)의 왕 모용수(慕容垂)는 중산(中山-지금의 하북성 정정)에서 병사를 이끌고 활대(滑臺-하남성 활현)에 포진하고 있는 적소(翟釗)를 향해 진군하여, 여양진(黎陽津-활현 북부)에서 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이때 적소는 강 남쪽 기슭에 정예병을 포진해놓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모용수는 도하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고의로 부대를 이곳에서 40여 리 떨어진 서쪽 나루로 이동시킨 후 쇠가죽으로 만든 배 1백여 척을 이용하여 ‘의병(疑兵-상대에게 혼란과 의심을 일으키려고 일부러 내보내는 병사나 군대)’을 싣고 강을 건너는 것처럼 꾸몄다.
적소는 이를 진짜로 믿고 즉각 주력군을 서쪽 나루 맞은편 기슭으로 이동시켰다. 모용수는 자신의 ‘시형술’이 성공한 것을 보자, 부장 모용진(慕容鎭)에게 명하여 여양진에서 밤을 틈타 강을 건너게 했다.
모용수의 군대는 날이 밝을 무렵 맞은편 기슭에다 진영을 칠 수 있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안 적소는 서둘러 회군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급히 되돌아오느라 지친 군대는 결국 모용수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후한 말에 조조와 원소가 관도(官渡-현 허난성 중무 현 근처)에서 대치했다. 이때 원소는 부장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 및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현재 황하 남쪽 강변)에서 공격하도록 하고, 원소 스스로 주력을 이끌고 여양에 이르러 전군이 도하했다. 조조가 북쪽의 연진을 구하려는 것을 본 순유(荀攸)가 말하기를, “지금 적의 병력이 약하기는 하나 아군 병력을 분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조공께서 연진으로 가서 군은 도하시키면, 원소는 반드시 서쪽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그 후 경기병으로 백마를 치고 허술한 방어를 보강하면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조가 이 계책을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겼다. 이 소식을 들은 원소는 다시 도하 하여 병력을 나누어 서쪽으로 대응했다. 조조는 군을 철수하여 백마로 향해서, 백마까지 십여 리 거리에 도착했을 때, 안량이 놀라 공격해 왔다. 이때 장요(張遼)와 조조군의 부장으로 있던 관우(關羽)가 안량군을 격파하고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근대 전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이 따르는 것이 적전 상륙작전이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상륙지점을 어떻게 비익(裨益) 하느냐이다. 이러한 점은 도하작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그 결행 일과 상륙지점을 여하히 하여 비익하고 독일군을 기만하느냐가 성공의 중요관건이었다.
영국에 집결한 연합군 상륙부대는 지상군 39개 사단, 군용기 약 1만 1천 대, 수송기 2천 3백 대, 글라이더 2천 6백 기, 군함과 수송선 및 각종 상륙주정 6천 척 이상인 대병력이었다. 연합군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 대장이다.
연합군의 북프랑스 상륙이 눈앞에 박두했다는 것을 당연히 예상하고, 있는 독일군에 대하여, 상륙지점의 기만 작전이, 실시되었다.
연합군 상륙부대가 영국 남서부에 집결하고 있는 사이, 남동부에 위장 숙소, 전차, 상륙용 주정이 집결되어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D-day 당일에는 프랑스 서부 까레 지방 일대에는 수없이 많은 금속 편이 비행기와 선박에서 살포되었다. 이 금속 편이 독일군 레이다에 비행기와 선박으로 영상화되었다. 이로써 독일군 19개 사단이 까레 주변에 배치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기만 작전은 보기 좋게 성공했고, D-day 당일의 기상이 악천후였던 관계로, 상륙작전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독일군의 롬멜 원수는 휴가차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갔다.
D-day 하루 동안 무려 15만 명 이상의 연합군 병력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