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능이시지불능(能而示之不能)’은 ‘손자병법’ ‘계편’에서 제기하고 있는 ‘궤도 12법’의 하나다. 본래는 공격할 수 있고 수비할 수 있고 전투력도 있으면서 일부러 그렇지 못한 것처럼 가장한다는 뜻이다.
‘육도(六韜)’ ‘무도(武韜·발계(發啓)’ 제12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사나운 새가 다른 새를 습격, 하려고 할 때는 날개를 움츠리고 나직이 날며, 맹수가 다른 짐승을 노릴 때는 귀를 세우고 엎드리며, 성인(聖人)이 움직이려고 할 때는 반드시 어리석은 듯한 얼굴빛을 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이는 막판에 가서 단숨에 성공을 거두기 위한 행동이다.
‘오월춘추(吳越春秋)’ ‘합려내전(闔閭內傳)’에 이런 내용이 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명장 오자서(伍子胥)의 친구 요리(要離)는 체구도 작고 몸도 비쩍 말랐지만, 무적의 검객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겨를 때면 언제나 수비 자세를 취해 상대방이 먼저 공격해 들어오게, 만들었다.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몸에 닿으려 할 때 아주 교묘하게 피한 다음 상대를 찌른다. 오자서가 그에게 승리의 비결을 묻자 요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을 마주 대하면 능력이 없는 척하여 적을 교만하게 만든다. 그런 연후에 다시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이용하여 적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부추긴다.
적이 성급하게 헛된 공격을 해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허점을 틈타 별안간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검객의 논리라기보다는 의미심장한 용병사상을 품고 있는 전략가의 모습임이 엿보인다.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총명한 장수는 가상으로 적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대적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여 적이 나를 깔보게 만든 다음, 적극적인 준비를, 갖추고 기회를 엿보다가 적을 제압한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 할 수 없는 모습은 가짜며 할 수 있는 모습이 본질이요 기본이다. 이렇게 해야 적이 마비되었을 때 적에게 타격을 가해 승리를 끌어낼 수 있다.
이 계략은 전쟁의 전체 국면에 대해 전면적으로 파악한 다음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것이다. 이것은 적을 다루는 책략이자, 적에게 통제당하지 않는 계책이기도 하다.
세계 전사 상 찬연히 빛나는 기원전 216년 8월, 한니발이 연출한 칸나에 섬멸전을 들어 보기로 한다.
한니발은 중앙부에서 발생한 일시적 패배를 대담하게 받아들여서 적을 포위 섬멸했다. 이 전례는 양익포위(兩翼包圍)의 전형으로 그 후 전쟁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연구의 대상으로 살아 숨 쉰다.
근세 최고의 군사이론서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 제8부에서 ‘작전계획’을 전개하면서 칸나에 섬멸전에서 원형을 도입하여 대불전쟁(對佛戰爭)의 기초를 마련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수제자 슐리펜은 작전계획을 발전시켜 ‘슐리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작전 기조를 구축해 주었다.
걸프 전쟁에서 미국 및 다국적군을 대승리로 이끈 슈와르츠코프 장군은 칸나에 포위, 섬멸전에서 대우회작전의 틀을 발견하고, 집중과 양익포위 및 좌익을 강화한 일익포위로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목(李牧-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이 초전의 패배로 흉노를 유인하여, 측면에 전개한 군으로 흉노를 강타한 전략도 칸나에 섬멸전과 유사하다. 이목이 죽은 것이 기원전 229년이므로, 거의 같은 시기에 동서양에서 같은 전략 전술이 창출되었던 셈이다.
한니발이나 이목은 모두 보병을 중앙에, 기병으로 양익을 강화한 전통적 대형으로 돌진했다. 그런데 한니발은 교묘히 중앙을 凸형으로 하고, 그의 군에서 가장 약한 히스파니아와 가리아 보병을 돌출부에 배치하여 로마군의 화살 받이가 되게 했다. 전투가 개시되어 얼마 후 凸부는 무너져 패퇴했다. 기세등등한 로마군은 돌진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로마군은 凹형 진형인 강력한 카르타고 보병에게 양익포위 되어 있었다.
이때 카르타고군의 양익에 포진한 카르타고 기병이 우회 기동하여 로마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망이 완성된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칸나에 섬멸전에서 로마군의 전사자는 5만에서 7만, 카르타고군의 사상자는 5천, 일방적 승리였다.
이글이글 타는 여름 해가 질 무렵 전장을 덮은 것은 로마병의 시체였다. 전투가 끝난, 이날 밤 칸나에 지방에 이제 로마군의 그림자는 없었다. 역사상 최초의 야전에서 빈틈없는 포위섬멸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