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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즉실지(虛則實之)
  • 호남매일
  • 등록 2021-07-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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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虛)를 실(實)로 보이게 한다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책략의 운용은 변화가 무쌍하다. 모든 계략은 한결같이 ‘적을 계산하고 적에게 계산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주도권을 쟁취하고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허즉실지’는 자신이 불리한 형세에 놓여 있을 때 고의로 실력이 센 것처럼 위장하여 상대에게 위험을 가하고 함부로 진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전기법’ ‘허전(虛戰)’에서는 “아군의 형세에 허점이 있을 때 거짓으로 그 허점을 튼튼한 것처럼 보여 허실의 소재를 가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감히 아군과 싸우지 못하게 하면 전군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가짜로 진짜를 혼동시키는 계략이다.


기원전 207년, 유방(劉邦)은 요관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서 ‘허즉실지’의 전법을 구사했다. 그해 8월,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무관(武關-지금의 섬서성 상남현 서남쪽, 섬서성과 하남·호북성의 경계 지점)에 이르렀다.


당시 진의 승상 조고(趙高)는 2세 황제가 될 태자인 부소(扶蘇-진시황의 큰 아들)를 협박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부소의 이복동생인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세웠다가 자기 사위 염락(閻樂)을 시켜 망이궁(望夷宮)에서 시해하고, 부소의 첫째 아들인 자영을 무리하게 황제로 세웠다.


9월 자영은 조고를 암살하고 군을 정비하여 요관(嶢關-지금의 섬서성 남전현 동남에 자리 잡은, 관중 평원에서 남양분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을 거점으로 삼아 유방의 군대가 서쪽으로 전진하는 것을 막도록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유방은 신속하게 요관을 향해 진군하려 했다.


이때 장량(張良)이 나서 가로막으며 말했다. “현재 진나라 군대의 힘은 상당히 강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일부 병사를 보내 무관 주위의 산꼭대기에 아군의 깃발을 꽂게 하여 진의 군대로 하여금 아군의 허실에 대해 의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역이기와 육가(陸賈)에게 많은 예물을 주어 진의 장수들을 매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방은 장량의 건의에 따라 ‘허장성세(虛張聲勢)’의 계략으로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한편, 역이기로 하여금 후한 뇌물을 진의 장수에게 보내 현 상황의 이해관계를 들어 회유와 협박의 강·온 양면책으로 유방과 함께 진의 수도 함양으로 쳐들어가자며 설득하게 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려 갑자기 진군을 공격했다. 유방은 요관을 돌아 궤산을 넘어 남전 이남에서 진군을 대파하고, 빠른 속도로 함양(咸陽-지금의 함양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진 왕조를 끝장냈다.


유방은 장랑의 꾀에 따라 ‘허즉실지’의 계략을 채용하여 진나라 군대에게 겁을 주어 복속시켰으며, 자영은 옥새를 들고 ‘백마가 이끄는 빈 수레를 타고’ 성을 나와 유방에게 항복했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은 섬서성 면현 서쪽인 양평도에 주둔하여, 부장(副將) 위연(魏延)으로 하여 주력부대를 이끌고 일제히 동으로 기동하게 하고, 자신은 불과 1만 병력으로 성을 지켰다.


위(魏)나라의 사마의(司馬懿) 장군은 촉한 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20만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으나, 진격 길이 달랐기 때문에 위연군과 빗나가서 그대로 제갈량이 수비하는 성의 부근에 도달했다. 제갈량이 있는 성까지는 불과 60리 거리였다.


사마의 휘하에 있는 정찰대가 귀대하여, 공명이 성안에 있으며 그 수비 병력은 적다고 보고했다.


제갈량도 사마의의 군이 접근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미 지나치게 접근해 있었다. 위연군과 합류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고, 사마의 군과 싸우기에는 너무도 병력의 차이가 컸다.


성을 수비하는 촉한 군 병사들은 겁에 질려 안절부절 했다.


그러나 공명은 태연자약하게 병사들에게 정기를 내리고, 북을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명한 다음, 한편으로 성문 4개를 활짝 열어놓고 지면을 깨끗하게 쓸고 물을 뿌리게 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은 언제나 신중하게 계략을 세워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군의 방비가 허술한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마의는 복병이 있지는 않은가 의심하고, 공명의 계책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북쪽 산중으로 퇴각했다.


사마의는 정찰에서 돌아온 정찰대장으로부터 정확한 상황보고를 듣고도, 자기에게 찾아온 호기를 놓치고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제갈량전(諸葛亮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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