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다. “시골에 계신 오라버니댁 말린 고추 팔아 달라는데…” 고추농사가 잘되었나 보다. 시골길을 갈 때면 붉은 고추를 보면 마음이 심란하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붉은 고추를 따시는 시골 할머니의 굽은 허리부터 떠오른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반찬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것에 익숙하다. 냉장고에 딱딱해진 고춧가루 통을 보면서 살림을 못하는 마음을 스스로 위로도 했던 것 같다. 주변에 전화를 돌려보았다. 식구가 적어 많은 양의 고춧가루가 필요하지 않는 집이 많다.
모처럼 고향집에 계시는 오라버니의 부탁이라 마음을 써 정성을 모았다. 오라버니에게 전화를 걸어 고춧가루를 택배로 보내 달라했다. “시골인심 야박하다고 작게 주문 한 사람 한줌이라도 더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것다.” 라는 오라버님의 말에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오라버니는 전체를 팔았으면 하지만 김치를 담그지 않는 집에는 많은 양은 소화하기 힘들다.
애쓴 보람도 없이 야박한 소리를 듣다보니 괜한 짓 한 것 같아 마음만 상해 남편에게 일러 바쳤더니 듣지도 않고 서재로 들어가 버린다. 심드렁한 마음에 언니에게 전화를 해 다음부터 이런 부탁 하지 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사는 벗이 늦여름이면 해년마다 친정엄마 고추 팔아주느라 마음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서울에 사는 벗은 친정엄마가 고추를 따서 세 번 씻어 태양빛에 말리어 꼭지 따내고 씨앗을 빼 고춧가루를 만들어 서울로 보내시는 정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와 결국 자신의 돈을 더 보태 엄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올해도 엄마의 넋두리를 들으며 고추 팔 일이 걱정이라는 벗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을 달랬다.
어디 이러한 사연뿐이겠는가? 고향이 농촌이라면 누구나 한번 정도 경험했을 것이다. 가을 수확 철이 되면 고구마, 밤, 땅콩, 과일 등 다양한 농수산물이 톡 방에 올라와 함께 나눔의 장터를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정성을 들인 농부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고추를 따는 일보다 봄부터 모종을 심고 바람에 넘어지지 않게 노끈으로 묶어주고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끌어다 작물을 키운 농부의 마음을 안다면 괜한 투덜거림인 것 같다.
시골에 계신 오라버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님이 전화를 받았다. 요즘은 무슨 일 하면서 지내시냐는 말에 새벽 네 시면 일어나 마을 한 바퀴를 산책 하신다고 한다.
백세가 가까워지는 나이 듦에 대해서 두려워지는 아버지는 연신 “네 오빠와 새언니가 고생이지야.” 하신다. 아버지는 새벽 벼이삭 부딪히는 소리가 좋다면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계셨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면 사람이 놀래니 동이 트는 무렵에 마실을 가는 것이 어떠냐고 여쭈었다. 어두운 새벽길에 발을 잘못 디딜까봐 걱정이 앞선 마음을 담아서 이야기했다.
가을이 저만치 오는 것 같다. 벼이삭도 고개를 숙이고 나뭇잎도 한두 잎 붉은 색을 띤다. 푸른 깻잎을 따다 장아찌를 담가야 할 시기다. 깨 털고, 콩 따고, 호박, 가지 따다 말려야 한다. 농작물 거둬들이는 농부의 손길이 바빠지는데 늦여름의 바람이 고맙다.
가을이 올 무렵이면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 마음이 기운다.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이야기도 없는 여름날에 고추로 한 소동 한 판 벌인 것 같다. 풀벌레 소리가 울어 제친다. 이제 머지 않아 작열하는 태양도 기세가 줄어들 모양이다.
일요일 하오에 나주에 터를 잡고 사는 벗이 있어 잠시 들렀다. 태풍이 불어온다는 일기예보에 벗은 고추를 따야 한다며 고추밭으로 나선다. 여름 햇살에 잘 여문 고추 몇 개를 땄더니 허리가 아프다. 이렇게 힘들여 지은 농작물을 싼 값으로 내 놓아야 하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반평생이 농부였던 아버지는 이른 새벽 벼이삭 부딪히는 소리를 좋다며 산책을 하실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제치며 논둑길을 걷는 농부의 손길과 마음길이 있어 올 농사도 풍년이다. “잘 여문 작물을 보면 웃음이 나제.” 나주 벗의 옆 밭 고추를 따시는 할머니의 말씀에 농사짓는 마음을 읽어본다.
벗의 텃밭에서 둥실한 호박 한 덩이를 손에 따 들었다. 한 알의 열매가 맺기 위해 햇살 한줌, 바람 한줌, 농부의 손길 모두 애썼다. 따사로운 햇살이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우리가 함께 가을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오라버니의 고추를 팔려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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