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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있어야 정치가 있다
  • 호남매일
  • 등록 2021-09-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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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변죽 - 배한봉作



변죽을 아시는지요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 사람으로 치면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


변죽 울리지 말라고 걸핏하면 무시하던


그 변죽을 이제 울려야겠군요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그 중심도 실은 그릇의 일부


변죽 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이 아니지요


당신, 아시는지요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변죽,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변죽, 삼거웃 없는 마음을


중심에 두고 싶은,


변죽을 쳐도 울지 않는 복판을 가진


이 시대의 슬프고 아픈 변죽들을 <2004년>



배한봉(1962년생)


경남 함안 출신으로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변죽은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란 뜻을 가졌다. 사람으로 치면 시에서처럼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이 되고, 주연도 조연도 못 되는 흔해 빠진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하다 하겠다.


‘변죽을 울리다’도 ‘바로 콕 집어 말하지 않고 둘러서 말을하다’란 뜻이며, 어떤 일을 큰 사건인 양 소개하다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흐지부지 끝났을 때도 사용한다. 'ㅇㅇㅇ 수사, 변죽만 울리다 끝나다'가 그 예가 되겠다.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삶의 무대엔 빛나는 주연이 있고, 조금 덜 빛나는 조연이 있지만 엑스트라 1, 2, 3, 4, 5...도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다 주연이 되기를 원하는 시대에서 보면 참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변죽 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이 아니지요”란 말에서 보다시피 아무리 주연과 조연이 뛰어나도 엑스트라가 없으면 그 둘은 빛을 잃을게다. 변죽이 없다면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 변죽,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 변죽,” 변죽은 우리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변죽이 되어야 그 가치를 얻는 이가 많다.


소외된 세상에서 변죽은 변죽끼리 어울려 뭉치면 더 이상 변죽이 되지 않고 중심이 될 수도 있다. 역사를 움직인 존재는 빛나는 몇몇 위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같은 변죽들이었으니까. "변죽을 쳐도 울지 않는 복판을 가진 / 이 시대의 슬프고 아픈 변죽들을" 이 시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중심(정치)들은 더 이상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변죽을 치면 중심이 소리내야 하건만 그들은 침묵할 뿐이다.


그런데 가장자리를, 변두리를, 끄트머리를, 언저리를 가볍게 여긴 그들이 오히려 슬퍼 보임은 필자의 생각일까? 혹 그대 스스로 변죽이라 여기신다면 보잘것없음이 아니라 진정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라고 시인은 넌지시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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