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고

Top
기사 메일전송
가을의 말
  • 호남매일
  • 등록 2021-09-14 00:00:00
기사수정

/김명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하늘의 흰 구름이/ 나에게 말했다./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느 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뜨락의 석류가/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라/ 잘 익어서 터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이해인 수녀의 ‘가을의 말’ 을 새기며 세월의 길을 걷는다.


봄날에 만났던 길을 걷고 싶었다. 찬바람이 적당하게 볼을 스치며 걷는 강 길이 그리워진 것은 가을이 오고 있어서일까? 그 봄날에 만났던 들풀들의 생명이 움트는 소리를 듣고 싶어 무작정 도시락을 챙겨들고 전북 진안의 가막리들로 향했다.


초가을 가막리들 강변의 풀들은 무성하게 웃자라 자리를 잡았고 만물이 초연해지는 시간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없다.


가막리들이 시작되는 강변의 물소리도 힘차다. 여름내 받아두었던 강물은 거침없이 달린다.


가을은 풀벌레 소리로부터 오는가보다. 푸드득 푸드득 메뚜기가 풀밭사이로 쉼 없이 뛰어다닌다.


잠자리도 날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강변길을 걷는다. 발자국 소리를 줄여본다. 풀벌레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강변에 자연과 우리밖에 없다.


‘어제의 길은 오늘의 길과 다르다.’ 라는 김훈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봄 길과 가을 길은 달랐다.


봄은 생명이 샘 솟아오르는 연두 빛의 길이었다면 9월의 길은 퇴색되어가는 초록의 색이 이어지는 길이다. 이맘때쯤이면 들풀의 생명력이 최상의 조건을 가지는 시기이다.


가막리들 자갈밭이 깔린 강변길에는 들풀들의 모습도 정겹다. 강아지풀, 고마리, 여귀도 여물었다.


뒤 늦게 피었을까? 엉겅퀴 꽃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제철을 못 만나 생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자연도 사람도 시기를 잘 맞추었나 하나보다.


꽉 찬 가을 길을 돌고 온 날,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강변을 걸으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생각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 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라는 언어들이 입가에 맴도는 가을날이다.


남국의 햇살을 며칠만 더 준다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리라. 들판에 알알이 매달린 벼이삭이 바람결에 춤을 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수수는 머리를 땅으로 향해 있다. 여기저기 풍성함이 넘치는 들판이다. 간간히 만나는 돼지감자 노란 꽃도 가을의 풍경이다.


무주로 넘어가는 길에서 만난 사과나무 밭에서 붉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햇살, 바람, 농부의 손길이 머문 사과밭을 지나면 탄성이 나온다.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것들이 머문다는 것은 가을이 왔다는 것이며 수확의 계절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변을 지나오다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을 모습이 정겹다. 멀리서 보니 아름다운 풍경이다. 물속에 몸을 푹 담그고 고개는 바닥만 바라본다. 다슬기를 잡는 모습이 강변의 갈대숲과 잘 어우러지는 풍경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데 그들에게는 삶이다.


tvN 프로그램 ‘갯마을 차차차’ 드라마를 보았다. 할머니 셋이 노란 코스모스 길을 걷는다. “꽃을 심어놓으니 이렇게 예쁜 것을…” A 할머니의 말에 “젊었을 때는 왜 이렇게 예쁜 것이 안 보였을까?” 의 말에 B할머니는 “청춘 이었을 때는 우리가 꽃이잖아.” 그렇다. 맞는 말이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꽃이기에 들판에 있는 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월이 들어가면서 작은 것들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잡생각과 의미 없는 말들이 주절거린다. 가을이 되니 누군가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밤새 풀벌레가 운다. 저들도 마지막 삶을 준비하려는 듯이 애타게 울어제쳐 마음까지 심란해지는 가을날이다.


가을의 길목에서 청춘들에게 가을의 말을 전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빛나는 청춘이 되는 것은 최선을 다한 삶” 이라고, 누군가에는 바람결을 타고 아득하게 들려올지 모르는 잔소리라도 전하고 싶은 가을날이다.


계절의 능선을 타고 가을이 내려오고 있다. 물빛 노을 사이로 가을의 익어가고 있다. 가을이 익어가는 열매의 소리를 들어라. 가을의 언어를 기억하며 몇 편의 시를 읽다가 잠이 든다. 가을의 소리도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0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문화 인기기사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