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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자들의 '눈'은 무슨 눈일까?
  • 호남매일
  • 등록 2021-10-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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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눈 허형만 作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 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 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2002년>



이 시는 첫 행에 언급되었다시피 이탈리아 테너이자 팝페라 가수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안드레아 보첼리를 글감으로 하고 있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우리가 자주 쓰는 ‘본다’란 말에는 보통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몸의 눈’으로 본다와 ‘마음의 눈’으로 본다.


여기에 이 시는 하나를 덧붙인다. ‘소리로 본다’. 눈먼 가수는 소리를 통해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와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을 본다. 뿐만 아니다. “바람 가는 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 우주의 흙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 붉은 점 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남도 소리’ 연작의 한 편의 작품 가운데 영화화된 ‘서편제’가 들어 있는데, 눈먼 여자 소리꾼의 소리에 의해 선학동에 선학이 날아오르는 장면을 장엄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소설에서 느꼈던 소리의 힘을 이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느껴보려 한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그렇다. 두 눈 뜬 사람이 볼 수 없는 걸 눈이 먼 가수에게는 보인다. 이는 마음의 눈과, 소리의 눈이 있으니까. 몸의 눈으로만 본다면 아주 잠시 우리에게 머물 뿐이지만, 영혼의 눈으로 본 건 영원히 잊혀지지 안는다. 시인은 단순히 눈 먼 가수의 노래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 가수의 영혼의 눈을 읽었으니까.


이런 탁월함은 인간이 순수함을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두 눈으로 볼 수 있음은 분명 행복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눈을 갖고도 보이지 않는 것(곳)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은 더 행복하다고 안드레아 보첼리가 말했다. 두 눈을 갖고도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작금 정치지도자들의 ‘눈’은 무슨 눈일까?



▶허형만 시인(1945년생)


순천 출신으로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목포대 국문과 교수로 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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