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사패유적’의 책략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할 수 있으면서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능이시지불능(能而示之不能)’의 구체적 운용이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온다. 기원전 606년, 초나라 장왕(莊王)은 선조의 패업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자 내정을 개혁하고 대외적으로 정벌 전쟁을 벌였다.
장왕에 대해 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던 두월초(斗越椒)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장왕이 북벌을 나간 틈에 성급하게 반란을 일으켜 영도(?都)를 점령한 다음 장왕의 귀로를 차단했다. 장왕은 돌아오는 도중에 장서에서 반란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첫 전투에서 장왕의 군대는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다. 이에 장왕은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냈다.
거짓으로 군대를 후퇴시키는 척하면서 은밀히 대군을 사방에 매복시켜놓고 한 부대로 하여 적을 유인하도록 했다. 적이 있는 힘을 다해 추격해오면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집중 공격을 퍼부어 섬멸시킨다는 전략이었다.
과연 두월초는 상대가 패하여 도주하는 줄로만 알고 정신없이 추격하다가 뒤늦게 계략에 걸려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월초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반란군은 섬멸되었다.
남북조시대인 580년, 양견(楊堅-수나라 문제)은 우중문(于仲文)에게 위효관(韋孝寬)의 작전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중문의 군대는 양(梁)의 서울인 수양(睡楊-지금의 하남성 상구 서남)에서 약 7리 떨어진 요제에서 단양(檀讓)이 이끄는 많은 군대와 마주쳤다. 우중문은 정예병을 진영 뒤쪽에 매복시켜놓고 일부러 늙고 힘없는 병사들을 이끌고 진을 나가 도전했다. 단양은 상대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자 즉시 공격해왔다. 늙고 힘없는 병사들은 단 한 번 싸움에 즉시 뒤돌아 도망쳤다. 단양은 주저 없이 추격했다.
그 순간 양옆에 숨어 있던 정예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맹공을 퍼부었다. 단양은 속수무책이었고, 군대는 순식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단양은 잔병을 이끌고 간신히 성무(成武)로 도망쳤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조조가 유비의 ‘사패유적’ 계략에 크게 당한 내용이 실려 있다. 조조는 몸소 군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탈취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한수를 건너 배수의 진을 치라고 건의했다. 유비는 교전을 치르다가 당해내지 못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조조의 군대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추격했다. 촉 군은 한수 쪽으로 도주하면서 군영을 버리고 말과 군 장비도 길에다 버렸다. 추격하던 조조의 군사들은 그 물건들을 보고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이때 갑자기 조조가 징을 울려대며 병사들을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 장수들은 유비를 거의 손아귀에 넣을 판인데 왜 갑자기 철수 명령을 내리느냐고 되물었다.
조조는 촉 군이 애당초 물을 등지고 군영을 설치한 것도 이상하거니와 도망가면서 그렇게 많은 장비를 버린 것도 이상하다면서 빨리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촉군의 물건에 손을 대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목을 베겠노라고 엄명했다. 조조의 군대는 퇴각을 서둘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군대를 막 돌리려는 찰라, 촉군이 좌우에서 튀어나와 습격을 가했고 조조 군은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사패유적’의 관건은 ‘패한 척하는’ ‘사패(詐敗)’에 있다. 이것은 진짜로 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강적을 맞이하여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을 때는 반드시 강한 적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예컨대 ‘36계’에서 말하는 ‘줄행랑이 상책’이라는 말도 수동적인 입장을 주동적인 입장으로 바꾸는 책략임에 유의해야 한다. ‘사패’가 적을 유인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자기 자신에 의해 결정 나기도 하지만 적에 의해 결정 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쌍방은 모두 상대방의 의도를 간파하여 서로를 이기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속이기’를 잘못하면 적의 ‘속임수’에 걸려들게 마련이고 적의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면 적의 덫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사패’는 사건과 장소가 교묘하게 맞아떨어져야지, 너무 빠르면 적에게 간파당하기 쉽고 너무 늦으면 몸을 빼기 힘들어진다. ‘정도’가 알맞아야 여러 가지 가상을 만들어내서 적을 현혹·유인·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초나라 장왕은 ‘사패’를 활용할 때, 복병을 배치해놓고 몸소 일부 병력을 거느리고 새벽에 패주하는 척했다. 그와 동시에 백성으로 가장한 병사들을 두월초의 진영에 보내 지금 장왕의 군대가 청하교(淸河橋)에 이르렀다고 밀고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다리 북쪽에서 아침을 짓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가 두월초가 추적해오자 취사도구를 버리고 도주함으로써 적군을 완벽하게 유인했다. 또 장왕은 두월초가 자신을 사로잡고 싶어 한다는 심리를 이용하여 후방 병사들로 하여 ‘장왕이 바로 앞에 있다’고 떠들게 함으로써 적군이 서둘러 달려오도록 만들었다.
‘사패’는 적을 유인하기 위함이요, 적을 유인하는 것은 적을 섬멸하기 위함이다. ‘사패’할 때는 적으로 하여 진짜로 패한 것처럼 믿게 만들어야지, ‘속임수 패배’라는 의심을 하게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 또 자기 부대원의 정서를 헤아려 사상 공작을 운용함으로써 패배주의와 같은 정서가 생겨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해야 한다. 그리고 반격의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이 점은 ‘사패유적’의 계략을 운용할 때 가장 돋보이는 단계 또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전쟁은 기동력이 크게 높아졌을 뿐 아니라, 전투지에 대한 관찰과 정보 분석의 능력 면에서도 냉병기 시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대 장비와 전쟁 무기가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이 계략의 운용은 여전히 큰 속뜻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