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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속 사랑
  • 호남매일
  • 등록 2022-01-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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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밤 _이기윤 作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몸을 웅크리고


가끔 마른기침을 하신다


깜빡 잠이 들어버린 뒷마당


또래의 꾀양나무는


하얗게 눈썹이 세어가고


내 나이 한 살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 섣달 그믐밤


긴 밤 꿈을 꾸며


꿈을 잃어가며 밤새도록 지금 나는


아버지가 되어 가는 중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 아득한 행간에 누워



자식이 위험한 곳에 갔다 돌아오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앞서 달려 나가 눈물로 껴안으며 “아이구, 내 새끼! 살아 돌아왔구나!” 한다면,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한 걸음 뒤 걸어 나와 한껏 감정을 죽인 채, “애썼다” 한 마디로 끝낸다.


그래 어머니는 감정을 ‘문장’, 아버지는 ‘단어’로 전한다는 표현을 쓰는가 본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 몸에 감고 잔다.”


모든 자식은 부모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존재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아들은 아비의 등골을 빼앗아 가며 살아간다. 아들도 나중에 그의 아들에게 빼앗기며 살아 갈게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 몸을 웅크리고 / 가끔 마른 기침을 하신다.”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초라하고, 외롭고 안쓰러워 보인다. 덮고 있는 이불도 춥고 스스로 이불된 그 모습은 더욱 춥다. 덮고 자던 이불을 아들에게 빼앗기고도 오히려 잠자리를 다독여주는 모습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답다.


“깜빡 잠이 들어버린 뒷마당 / 또래의 꾀양나무는 / 하얗게 눈썹이 세어가고 / 내 나이 한 살이 목에 걸려 / 잘 넘어가지 않는 섣달 그믐밤“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이 있다.


섣달 그믐밤이 애닮은 까닭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기 때문이다.


“긴 밤 꿈을 꾸며 / 꿈을 잃어가며 밤새도록 지금 나는 / 아버지가 되어가는 중이다” 아비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살수 밖에 없으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 / 그 아득한 행간에 누워” ‘나’는 나이는 먹었으나 아직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희생과 사랑과 배려심을 아버지만큼 갖지 못했다는 표현인가 보다.


어머니를 글감으로 한 시는 많지만 아버지를 노래한 시는 많지 않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당연히 오늘 찾아뵙거나 전화라도 안부를 물어야겠지요. 비록 “왔어” 한 단어만 듣더라도, 자식 차 소리에 어머니 뒤에 나온 아버지의 침묵에 담긴 속 사랑을 느껴 보시길.


▶이기윤 시인(1954년~2009년)


부산 강서구 갈대섬 ‘중사도’ 출신으로 육사 33기로 3학년 때(1977년) 첫 시집을 내고, 1997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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