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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기억
  • 호남매일
  • 등록 2022-07-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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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한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 올 때의 일입니다.’ ‘여름의 일’ 시로 소주제가 ‘묵호’라고 되어 있는 박준 시인의 글을 읽는다. 여름이라는 단어를 보니 무더위에 내 한 컨의 소소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시간을 맞이한다.


어릴 적 기억이다. 여름 장마가 길게 이어지는 여름날이면 아버지는 너른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한쪽에 보릿대로 모깃불을 피웠다. 어머니는 광에서 밀가루를 가져와 반죽을 하였다.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고 밀 때 난 옆에서 밀가루를 뿌렸다. 아버지는 샘가에서 칼을 갈고 계셨다. 밀가루 반죽이 어느 정도 되었을 무렵에 어머니는 날이 선 칼을 들어 접혀진 밀가루 반죽을 잘게 썰었다. 난 어머니가 쓴 국수를 밀가루를 묻혀 훌훌 털었다. 그때쯤 팥물이 끊어 오르면 어머니는 면을 툴툴 털어 넣었다. 몇 번이나 국자가 저어지면 멍석에 앉아 온 가족이 모여 팥죽을 먹었다. 그날 반찬은 오이냉국과 고구마 순으로 만든 김치였다.


시골의 여름날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오후가 되면 아낙네들은 밭으로 나가 고구마 순을 뜯었다. 텃밭에는 오이, 가지, 고추가 제철을 맞이해 저녁 밥상에 풍성하게 올라왔다. 내 기억에서 오후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시원한 샘가가 있는 집 평상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고구마 순 껍질을 벗겼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고구마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다. 고구마 순이 벗겨지는 날이면 고구마 순 김치를 담가 먹었다. 그날 먹어도 맛있고 며칠을 두고 먹어도 되는 고구마 순 김치는 지금도 좋아하는 먹거리다.


여름이 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풍경은 7월이 되면 기억되는 것일까? 여름날이 깊어질 무렵이면 어머니는 옥수수를 밭에서 꺽어 왔다. 어머니는 옥수수를 삶을 때 수염을 다 벗기지도 않고 껍질도 벗기지 않는 채 삶았다. 그때는 옥수수 먹기가 불편했던 것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건강에 좋은 음식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옥수수는 여름철에 맛있는 간식거리이며 누구나 좋아한다. 7월 중순쯤에 벗에게 연락이 왔다. “올 옥수수 마지막이다.” 나주에 터를 잡고 사는 벗의 옥수수를 좋아한다. 벗의 옥수수는 강원도 찰옥수수가 아니다. 내 어릴 적 먹었던 옥수수 맛이다. 해년마다 벗과 같이 사는 이는 옥수수를 많이 심는다. 그리고 가마솥으로 한보따리 옥수수를 쪄서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그 옥수수가 첫 번째 수확하는 날은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다. 옥수수 수확을 했다고 불러 주는 벗이 고마워 한걸음에 달려갔다. 가마솥에서 옥수수를 꺼내와 하모니카를 불듯이 먹었다. 벗이 농사지은 옥수수는 시골에서 기른 옥수수라 연하고 부드러워 몇 개를 먹어도 계속 먹고 싶어진다. 어릴 적 먹었던 연하고 부드러운 옥수수 맛이다.


여름날의 기억은 현재의 삶과 연결되어 또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무더위에 지친사람들의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여름날이다. 이번 주로 장마도 끝이 나며 더 질긴 무더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민감한 하루를 맞이한다. 7월의 마지막 주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무더위와 싸우고 매일 들려오는 정치이야기에 기분이 나쁜 여름날의 기억보다는 알찬 기억을 쌓는 여름날이 되었으면 한다. 무더운 여름을 피해 누군가는 가방을 쌀 것이다.


여름날의 기억에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여름날의 기억은 있다. 절망, 참회, 즐거움, 행복, 기쁨, 슬픔 등 모든 기억들이 여물어진 기억에서 우리는 이제 가을의 스산한 바람의 문턱을 기다려야 한다. 여름의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 여름의 끝에 있었으면 한다.


해마다 여름의 시작되는 시기이면 모자를 산다. 해년마다 산 모자가 나의 여행길을 말해준다. 올해는 가장 챙이 넓은 모자를 챙겼다. 그 모자를 쓰고 여름여행을 떠난다. 먼 훗날에 여름날의 기억은 나에게 찾아올 것이다. 오늘도 설렘임 가득한 마음으로 모자를 쓴다.



지친 여름이다. 우리 모두 가슴 벅찬 여름날의 기억을 담아보자. 그러다 보니 무더위도 제풀에 지쳐 그만 내려놓을 것이다. 자 이제 가장 마음에 드는 모자를 쓰고 여름날의 가장 좋은 기억의 장치를 만들 준비를 해 보자.


/김명화(교육학박사·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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