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민족민주화 대성회에서 연설하는 박관현 열사. 2022.05.14. (사진=관현 장학재단 제공)
신군부의 비상계엄해제와 언론 자유 등을 촉구하다 붙잡힌 뒤 옥중 단식투쟁으로 숨진 고(故) 박관현 열사의 추모식이 엄수된다.
11일 박관현기념재단(재단)에 따르면 오는 12일 오전 11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역사의 문에서 박 열사 40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식에는 유족과 당시 전남대총학생회 투쟁 동지, 5·18 단체·기관 관계자 등이 참석한다. 추모식에서는 박 열사의 생전 발자취를 기리는 행사도 마련된다.
이어 같은 날 오후 4시에는 광주 동구 5·18기록관에서 \'그리운 박관현\'을 주제로 집담회도 열린다. 집담회에서는 박 열사와 민주 투쟁에 앞장섰던 옛 동지들이 나서서 그의 삶을 그리고 추억한다.
박 열사는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법조인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78년 서구 광천동 공단에서 하루 14~15시간을 일하던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두 달 간 조사하기도 했다. 야학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치며 소외된 이웃을 돕는 데도 힘썼다.
19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박 열사는 \'어용교수 퇴진\' 등 학내 자율화를 외쳤다. 신군부의 재집권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학생회를 정비·개편해 같은 해 5월 8일 교내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열었다.
14일부터는 광주 시내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범시민 성격 성회를 이어갔다. 운집한 군중 앞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도 낭독했다.
박 열사가 사흘 간 이어간 성회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 계엄군에 맞선 단초가 됐다. 이후 수배명단에 오른 박 열사는 도피 생활 중이던 1982년 붙잡혀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 내에서 \'5·18 진상 규명\' 등을 외치며 50여 일 단식 농성을 이어간 박 열사는 건강 악화로 1982년 10월 12일 만 2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재단 관계자는 \"박 열사 서거 40주기 추모식은 그의 삶과 고민, 노동자들을 향했던 사랑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그가 남긴 민주화를 위했던 발자취는 불혹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