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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 번째
  • 호남매일
  • 등록 2022-10-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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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식 한국문협 ·시조시인협회원



아내가 교회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기 바쁘게 이야기를 꺼낸다. 내용인즉 목사님이 아들과 나눈 대화였다.


아들이 공룡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기에 ‘공룡과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물었다. 아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공룡이 좋다고 했다. 정말 아빠보다 공룡이 더 좋으냐며 다그쳐 물으니 공룡도 좋고 아빠도 좋다고 하더란다.


이번에는 ‘공룡과 엄마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물으니 아들은 서슴없이 ‘엄마가 좋다’고 했다. 순서는 결정되었다. 엄마, 공룡, 그리고 아빠. 결국 자신이 세 번째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준비를 시작한다.


식탁에 앉자마자 압력밥솥 자명종이 울린다. 아내는 막바지 준비를 하며 혼잣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중얼거린다. 번뜩 스치는 게 있어 말을 걸었다.


“여보, 무엇이 그렇게 감사해.”


“감사한 것이 어디 하나 둘이여, 많지.”


첫째, 제 나름의 일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자식들 주신 것 감사하고 내가 원한 만큼 이렇게 편안히 살 수 있는 아파트 주신 것이 감사하단다.


“다음은.”


내가 힘주어 물었다. 내 의도를 얼핏 거니챈 아내가 내 눈치를 살핀다.


“당신 만난 것도 감사하지.”


아내가 ‘픽’ 웃는다. 아리송한 웃음이다.


“응 알았어, 나도 세 번째구먼.”


아내도 ‘픽’ 웃음을 터트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내 말이 맞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답답해하던 아내였다. 수줍어 웅크린 손목을 잡아끌어 육십령 칠십령 보릿고개를 어렵사리 넘어왔다. 오직 가정과 자식밖에 모르며 일심으로 살아온 참으로 고마운 아내다. 아마 내가 퇴직을 하면 그간에 가보고 싶었던 곳 가보고 먹고 싶었던 것 먹어보는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무척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퇴직하더니 시(詩)를 쓴답시고 골방에 들어갔다면 나올 줄을 모르니 답답했을 것이다. 머리가 무겁다며 탁구장으로 달려가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나다. 이렇듯 ①시음(詩淫)하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 어디 있겠는가? 투정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시(詩)하고 잘 살아보란다.


문학에 전혀 문외한(門外漢)인 나였다. 그런데 퇴직 후 뜬금없이 시(詩)마니가 되어 등단을 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산삼이나 장뇌삼도 아닌 더덕이나 도라지 한 뿌리만 캐어도 별 것인 양 호들갑을 떤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꼭 맞다. 알 듯도 하고 될 듯도 싶어 불치하문(不恥下問) 심취하고 있는데 함께 놀자니 답답하기는 피장파장이다. 아니, 지금은 내 쪽이 더하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보라며 방법을 제시해봤지만 잘 안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아내는 처제의 권유로 크로마하프에 열중하면서 생활에 리듬을 다시 찾았다. 감사한 일이다.


남편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집 없이 어찌 산단 말인가. 길바닥에서 살 거여, 다리 밑에서 살 거여, 개인주택 삼십오륙 년만에 주문처럼 외던 아파트인데. 집 없이는 못산다. 그리고 이 늙음에 자식 없이 무슨 낙(樂)으로 산담? 삼남매에게 매일 전화점검 빠뜨린 날이 없다.


목사님의 아이나 아내가 그 순서를 어찌 모르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잠시 잊고들 산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응당 있는 것이려니 한다. 아니 영원히 곁에 있을 것으로 알고 지나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그것을 잃고서 가슴 아파한다. 그동안 우선순위가 바뀌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공기나 물이 그렇듯 부모나 부부간도 마찬가지다. 세상 핑계 대지 말고 가끔은 챙겨볼 일이다. 시(詩)도 좋고 운동도 좋지만 이제는 함께 할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해야겠다.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목포 유달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약혼하고 다녀왔으니 사십년이란 세월이 훌쩍 넘어섰다. 나도 참 무던하다. 그때 기분이 열에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① 시 짓기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여 생활을 돌보지 않는 일.(詩淫)



- 아내의 일기장 -



야속한 마음 접고 슬쩍 펴 본 아내 일기


자식이 1 번이고 부모님이 2 번이다


삼 번은 틀림없겠지 강아지가 웃었다


무심결에 넘긴 첫 장 신혼 적 내 마음판


대서특필 아내 이름 석태만 무성했다


하뿔싸 이 뒤듬바리 누굴 믿고 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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