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화 교육학박사 ·동화작가
가을이 오면/ 창밖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방으로 돌아와 나 홀로 서성인다./ 가을이 오면/ 누군가 나를 따라 서성이는 것만 같다./ 책상에 앉아도 무언가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아/ 슬며시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나도 너를 따라 서성인다. 라는 박노해 시인의 ‘서성인다’ 라는 시를 읽으며 가을의 정서를 담아본다.
가을이 없는 계절 가을에서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지척에 있는 동네 숲을 가을이 되어서야 만났다. 어느새 가을은 소리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개미취와 구절초는 벌써 지고 쑥부쟁이는 보랏빛 빛깔을 나부끼며 우리를 반기고 있다.
올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5월부터 시작된 여름은 10월이 되어서도 빛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지 낮 온도는 25도가 넘는 더위는 짜증을 유발시켰다. 그래도 가을인지라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가을 없는 가을을 찾으려고 동네 산책을 나선 것이다.
숲길에서 만난 가을은 바람이 나부끼고, 맑아진 가을볕이 곡식들을 익어가게 한다. 흔들리는 작은 감국에 손 한번 흔들어주고 도토리 물고 지나가는 다람쥐에게 인사를 나눈다. 가을에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식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가을이 오자 식물에는 씨앗이 맺히기 시작하고 꽃들은 마지막 자신의 모습을 뽐낸다. 씀바귀 꽃도 노랗게 피었다. 치나물 꽃 하얀 꽃잎은 흔들며 지나가는 길손의 발걸음을 잡는다. 산수국 꽃잎은 꽃잎과 색을 같이하면서 가을 속으로 들어가며 개마승 풀꽃은 씨앗을 맺고 있다.
산책을 같이 하는 이가 “가을이 오기는 왔나보다. 산들 바람이 불어주니 가을가을 하네.” 하는 이야기는 가을의 꽃들이 바람이 나부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숲속에도 감나무도 빠알간 열매를 맺었다. 나무 밑에 붉게 물들어 떨어져 있는 감나무 잎도 제몫을 다했나보다.
붉은 감나무를 보니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가 했던 언어가 떠오른다.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집에 있는 감나무 안부를 묻는다. “감이 감나무를 꼭 붙잡고 있더냐.” 아들에게 묻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감이 주체가 된다. 어머니의 언어는 한편의 아름다운 시다.
가을에는 시골길을 걸으며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된다. 주렁주렁 열린 호박도 이야기가 되고, 붉게 물든 감나무도 한편의 서시시다. 도시 근교에 집을 짓고 사는 벗도 올해는 감이 많이 열렸어. 감을 나누어 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 덧붙인 이야기는 농약을 안 해 감이 예쁘지는 않지만 건강한 감이니 곶감을 해도 좋고 말랭이로 말려서 먹어도 좋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부리나케 빵 한 봉지를 들고 벗의 집으로 갔다. 너른 집 마당에는 국화 잔치가 펼쳐졌다. 화단을 지나 현관문으로 가는 길에는 꽃길이다. 국화 화분이 나를 안내해 주고 있었으며 마당에는 항아리마다 국화 분재가 놓여 있다. 가을이면 여기저기서 축제가 펼쳐지는데 마당에 벌써 국화 축제가 열렸다.
국화 분재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마당에 심어진 꽃들을 보았다. 다알리라, 천일홍, 코스모스꽃이 씨앗을 맺기 시작한다. 이집 마당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집 마당 앞쪽에 텃밭에는 겨울준비를 위한 배추, 파, 무, 갓이 가을 햇살에 풍성해지고 있다. 텃밭에 있는 배추 한 폭을 뽑아 쌈을 해 먹었다. 감칠맛이 난다. 가을 햇살을 듬뿍 받아 자란 무와 배추는 단맛이 난다.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감을 딴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맺힌 감나무를 보니 이탈리아 여행 시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 나무를 보고 좋았던 기억이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면 가을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고 나와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가을이 없는 가을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다. 박노해 시인의 시 ‘서성인다’ 마지막 부분이다. 가을이 오면/ 지나쳐온 이름들이/ 잊히지 않는 그리운 얼굴들이/ 자꾸만 내 안에서 서성이는 것만 간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내안에 서성이는 이에게 잘 살고 있노라고 가을 야기를 전해 보련다. 가을 없는 가을이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