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준 식 시인·작사가
문학동아리 모임에서 한 후배가 성큼 다가오더니 내게 묻는다.
“선배님, 지금 끼고 있는 반지에 무슨 사연이 있나요?”
화려함도 볼품도 없는 낡은 반지를 지성으로 끼고 다님에 궁금증이 끝내 인내를 포기한 것일 게다.
항상 배려와 호의가 몸에 배인 그였기에 물음에 깊은 뜻이 있음을 직감하고 되물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긴 하지만 왜?”
“몸이 냉한 사람에겐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왜소한 체격인지라 그 나름대로 아님을 챙겨주고 싶어서 한 고마운 마음을 왜 모를까? 그런 이력을 있는 줄도 모르고 좋아라며 여적 끼고 다녔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반지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존귀하고 하늘같은 분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가지 의미를 더하신 분이시다.
유교적 전통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종갓집 둘째 며느리로 들어와 딸 낳고 어렵게 얻은 첫 아들을 낳자마자 큰집에 덥석 내 주었다.
양자도 아닌 친자親子로 입적시켰으니 그 아픔이 오죽하셨을까? 지금도 짐작이 잘 안 된다.
그래야 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에 어머니와 나의 삶이 대회전을 한 것이다. 다행히도 뒤를 이을 많은 자녀를 두셨지만 부모로서 자식이 어찌 나눔의 대상일 수 있겠는가?
한편 백부伯父는 자신의 혈육으로 대를 잇고자 후일에 또 한 살림을 차리시니 세 가정은 분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결국엔 합의파양合意罷養하고 생가로 돌아왔으나 그간에 맏자식으로서 다하지 못한 불효는 내 삶의 족쇄였다.
그러던 수년 전 오랜 투병 끝에 소천하셨다.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생각지 않은 깊숙한 곳에서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던 은금폐물이 상당량 나왔다.
아내가 모두 팔아서 형제공동기금에 넣겠다하니 동생들은 형수님이 수고하셨으니 어머니가 물려주신 거라 생각하고 간직하란다. 아내는 응당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말림을 극구 고사하고 보탰다.
이렇게 어머니의 체취(體臭)는 하나 둘 나를 떠났다. 작은 흔적과 향마저 모조리 지우고 나니 처처가 공허다. 그러던 어느 날 번득 뇌리를 스친다. 늘 끼고 계셨던 그 반지가 생각난 것이다.
내 뜻을 알아들은 금은방 주인은 주는 돈도 사양하며 얼른 내 주었다. 그로부터 은반지는 나의 수호천사가 되었다.
어려운 시절 아내가 마음먹고 작만해 준 결혼 삼십 주년 기념반지를 물리고 그 자리에 어머니를 모신 것이다. 힘들 때마다 위로를 주신다.
이제, 따가운 아내의 눈총도 차츰 무뎌지고 평온을 회복한 요즈음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건강이 전 같지 않은 터에 몸에 좋지 않다는 말에 자꾸만 마음이 기울기 때문이다.
건강을 빌미로 다시금 불효를 저지르는 것만 같다. 흔들리는 마음을 아신다면 얼마나 섭섭해하실까?
얼마지 않아 어머니 3주기를 맞는다. 그때에 살짝 여쭈어봐야겠다.
-엄니
살랑바람 일어오면 그때 일이 어제 같아
꾀 벗고 냇바닥을 입에 물고 온 동네를
내 맘속 그 팔랑개비 지금도 돌고 있다
제 무게 저도 몰라 이리 뛰고 저리 날 때
난 괜찮다 배부르다 꼭 쥐어준 한 줌의 밥
헐배를 채우고 남은 눈물 한 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