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준식 시인·작사가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대보다 총칼로 다스리던 일제식민지시대는 참으로 서슬이 시퍼렇던 때였다.
언제 누군가의 모함으로 붙들려가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시대에 일본 총독의 말은 법이요 죽음이었다.
그 시절에 일본 총독이 산책을 하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그때 아들은 서슴지 않고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총독은 “내가 아니라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네가 존경해야 할 너희 선생님이라 하며 나보다 너를 더 잘 알고 너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을 주실 분이시다. 그러니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 최선을 다하면 너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며 훈계하였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그렇다. 담임선생님만큼 그 학생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학생의 가정환경과 문화수준 지적수준과 의식수준 성격과 생활습관 학습능력과 학습정도 소질과 잠재력 발전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예견은 물론 지도방향에 따른 고견은 담임 말고 누구에게서 듣는단 말인가?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을 존경하고 따를 때 그분은 나에게 좋은 가르침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존경에서 받아드려지는 것이다. 존경과 믿음이 없을 때 감격과 감동이 없으며 수고는 했으나 거둠이 없을 것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존경이 있을 때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선생님이 부르시면 ‘저요.’ 하고 달려오던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면 ‘왜요’하고 노려보며 고등학생이 되면 ‘뭐요.’ 하고 대어든다는 말이 있다.
조금 비약된 말이겠지만 이것은 가정교육과 인성교육의 부재이며 많이 가르치고도 실패한 우리교육의 총체적산물이 아닌가 싶어 서글픈 생각이 든다.
존경하지 않는 분의 가르침은 잔소리에 불과한 공염불이다. 서로에겐 불행한 만남이며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이다.
“내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선생님을 존경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어느 분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존경할 수 없는 부덕한 선생님을 존경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내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존경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부모님의 교양이요. 인격인 동시에 외길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단점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수준 높은 부모님.
선생님이 부족할수록 그 부모는 더욱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훌륭한 분이셨다”고
만일 자녀와 함께 “느그 선생.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생겼더라.”고 입맞춤하며 선생님 권위를 깎아내려 얻어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먼 훗날 자식으로부터 ‘우리 어머니는 참 무식했어’ 라는 커다란 불명예 훈장을 받게 됨과 동시에 공부 끝, 자식농사 망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존경할 스승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자랑스러운 나를 위하여, 내 자녀가 출세하여 금의환향하는 가슴 벅찬 그 날을 위하여서는 “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잘 못 봤거나 아니면 아마 무슨 뜻이 있을 거야”라고 하거나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 “너 착한 아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봤구나” 이렇게 따끔하게 꾸지람을 주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을 존경함, 이것은 바로 내가 잘되며, 내 자녀를 잘되게 하는 최고 최선의 길이요 방법이다.
스승은 비전 있는 가르침과 사랑을 주고 학생은 스승을 믿고 따르며 우러러 존경하는 아름다운 교육현장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