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네 고독과 내 쓸쓸함의 깊이를 어떻게 나눌까?’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던 문장이다. 각자의 삶에서 외로움의 깊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쉽지 않다.
긴 겨울 동안 많은 사고의 깊이에서 삶의 다양성을 경험한다. 끊임없는 사유는 인간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이유다.
인간마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 날은 훌쩍 산행을 떠나는 지인이 있다. 작은 배낭에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남들이 밟지 않은 산길을 걷다 보면 머릿속에 복잡한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P를 따라 설산이 된 무주로 동행했다.
무주구천동 길은 처음이다. 눈이 쌓인 무주의 골짜기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설경에 휩싸인 무주는 함성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설산이 된 무주 구천동은 갖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구천동 길을 걷는 이에게 적적하지 않게 하려고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마다 오리눈사람이 인사를 해온다. 길을 가다 멈추며 짧은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덧 백련암이다.
구천동 길을 굽이굽이 걸으며 얼음 사이로 흐르는 겨울 골짜기를 보며 힘차게 뻗어 나가는 P의 삶을 마주한 것 같았다.
하얀 눈길을 걷다가 커다란 바위에 돗자리를 깔고 집에서 가져온 사과 한 알을 나누고 목련차를 마시며 진은영 시인의 ‘청혼’이라는 시를 읊었다. 시는 맑게 내 안에 움직인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귀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상대 꽃이 피어 있는 눈 터널을 지나며 우리는 별처럼 웅웅거렸다. 그리고 하얗게 펼쳐진 향적봉에 올라 아름다움에 언어를 잃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산이 으르렁거린다. 겨울 산은 벌거벗은 나무 위에 소금을 흩뿌려 놓았다. 흰 화선지 위에 먹물을 뿌린 작품이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주목, 구상나무에 눈꽃의 조화는 설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바람이 불면 흰 눈 뒤집어쓴 나무가 흔들린다. 눈이 내리지 않는데 눈발이 날린다. 털모자 위로 하얀 눈이 쌓인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언어는 요동치고 있다.
겨울 산을 걸으며 자연의 만물이 언어가 되길 바란다. 끊임없이 얼음을 뚫고 지나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언어를 삼켰다.
언어는 누군가에게는 시가 되어 새로운 글을 만들어 낼 것이다. 흰 눈이 쌓인 설산은 이제 안녕, 찬 바람을 이기고 흙을 잠재우며 겨울 산은 봄맞이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