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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맛'
  • 호남매일
  • 등록 2023-05-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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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데킬라 - 문혜진 作



데킬라 생각나게 하는 비다


멕시코 남자 싸한 콧김이


플라타너스 잎새에 닿았다가


내 빨간 어깨로 뿜어지는 저녁



술잔을 탁자에 탁 내리치고


반달로 자른 레몬에


설탕, 커피를 꾹꾹 눌러


한입에 빨아들인다


침이 확 고이고


코끝이 시큰거려


신맛


단맛


쓴맛이


왈칵


죽은 애인의 주소처럼 밀려온다



\"인생은 참 화냥년 같아\"


그치? <2004년>



사람은 한 번쯤 겉멋에 따라 발길을 옮기고 싶을 때가 있다. 필자는 여유가 나면 꼭 남미를 둘러보고 싶다.


먼저 쿠바 산타클라라에 들러 ‘체 게바라’의 발자취를 추적해보다가, 저녁 무렵 부슬비 내리는 노천카페에 앉아 데킬라를 마시고…


페루 마추픽추에 올라가 잉카인들을 만나보는 일. 그때 맑게 갠 날보다 약간 구름이 낀 날이 좋겠다. 그래야 잉카의 혼령들이 거기 내려오기 좋기 때문이다.


이런 겉멋을 부려보려고 요즘 준비(?)를 하고 있다. 봄비 내리는 날 집 정자에 앉아 안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순천만을 내려다보며 막걸리 잔으로 손을 옮긴다.


“데킬라 생각나게 하는 비다” 비 내리는 날 유달리 막걸리와 파전이 생각나듯이 멕시코 사람들은 비 내리는 날에 데킬라가 땡기는가 보다.


달궈진 팬 위에 익어가며 내는 파전 소리가 빗소리와 닮아 땡긴다면, 데킬라는 레몬의 신맛과 소금의 짠맛이 비와 잘 어울린가 보다.


“맛 / 단맛 / 쓴맛이 / 왈칵 / 죽은 애인의 주소처럼 밀려온다” 신맛, 단맛, 쓴맛은 데킬라의 맛이기도 하지만 바로 우리 인생의 맛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쓴맛 단맛 다 본 인생’이라고 할때처럼,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죽은 애인의 주소처럼 밀려온다”는 비유. 이런 맛난 비유를 만나게 되면 그 시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인생은 참 화냥년 같아” 이 시행은 마치 예전 ‘TV문학관’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한 사람이 비 내리는 저녁 목로주점을 찾아든다. 그에게는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으나 그녀는 그를 남겨두고 하늘로 갔다. 어쩌면 그녀가 떠난 날에 비가 왔는지 모르겠다. 데킬라 한 잔을 따라놓고 술잔을 바라볼 때 그 유리잔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 따라 그녀가 더욱 그립다. 술이 몸에 배어들자 저절로 입에서 한 마디가 조용히 튀어나온다.


“인생은 참 화냥년 같아” 오늘 저녁 가는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꼽꼽한 날엔 절로 막걸리가 땡길 게다. 굳이 데킬라 아니라도 쐬주나 막걸리도 괜찮다. 그리운 그에게 이 시를 보내준 뒤 전화 한번 해 보시길…


▶문혜진 시인(1976년생)


경북 김천 출신으로 22살 때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28살 때 시집 ‘질 나쁜 연애’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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