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심복으로서 5공화국 \'2인자\'였던 장세동(86)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 사흘 전 광주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16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장씨는 1980년 5월 15일 공수특전사령부 작전참모(대령)으로서 수송기를 타고 광주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들렀다.
장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취재진과 인터뷰를 통해 \"전교사에 잠깐 들러 이틀 뒤(17일) 7공수 특전여단 2개 대대가 광주에 도착한다고 알렸다\"면서 \"전교사 실무자들 몇 사람 만나 \'(7공수여단) 배속 명령 받으셨죠. 잘 좀 돌봐주십시오\'하고 얼굴을 내밀고 왔다\"라고 밝혔다.
실제 7공수여단은 장씨의 광주 방문 이틀 뒤인 17일 밤 10시께 전북 소재 주둔지를 출발해 18일 새벽 1시10분 광주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쟁 직전 장씨 본인이 직접 광주를 방문했다고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장씨는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에도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광주에 머물렀다. 5월 24일에는 서울로 돌아가려다 군부대 간 오인 사격 소식에 부상사 수송까지 지켜봤다.
5월 27일 당시 전남도청 일원에서 펼쳐진 최후 진압 작전 때도 광주에 있었다고 장씨는 밝혔다.
장씨는 \"5월 26일 저녁에 광주에 가서 밤을 새운 뒤 27일 오전 (서울로) 왔다. 새벽 4시 (상황이) 종료가 돼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장씨의 상관이었던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5·18 당시 광주를 네차례 방문했지만, 인사·군수지원만 담당했을 뿐 (나에게)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은 없었다. 장(세동) 대령이 1980년 5월10일께부터 27일까지 광주를 수차례 방문했지만, 나는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때문에 장씨의 5·18 전후 광주 행적이 항쟁 당시 군 지휘 명령체계 이원화 등 의혹을 밝힐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씨는 5·18과 관련한 사과 용의를 묻는 질문에는 \"그건 자연스럽게 돼. 그런데 지금 당장 할 필요도 없고 할 것이 없다\"라고 했다. 또 \"내가 필요하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못할 이유도 없다. (5·18 유족들은) 희생된 아픔에 감정적으로 소화를 아직도 못 시키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한들 희생된 분들의 영령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장씨는 제30경비단장을 지내던 12·12 군사반란 당시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5공화국에서는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하며 \'부동의 2인자\'로 불리웠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