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준 식 시인·작사가
밤이면 인민군이 판치고 낮이면 경찰이 주도권을 잡았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산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총성에 새 숨 쉬며 설잠 자던 어린시절. 고요는 칠흑 같은 어둠보다 무서웠고 낮은 언제 그랬냐? 는 듯 화창했다.
그리고 두어 해 지났을까? 하늘바라기 우리학교에도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햇볕이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교실 깊숙이 손을 넣어 안아주는 나른한 오후였다.
“얘들아, 오늘은 영철이 장가보내자.”
짓궂기로 첫손을 꼽는 강호가 갑자기 큰 소리로 동의를 구한다.
아이들은 그가 말끝을 채 거두기도 전에 예전처럼 우레 같은 박수로 제청한다.
여학생들은 ‘끽끽’대며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가고 무심코 있다가 달려든 친구들에 붙들린 영철이는 몸부림을 친다.
앙탈을 암만 부려도 인해전술에는 속수무책이다. 아랫도리가 막 벗겨지는 찰라 꼬불쳐 넣어두었던 손때 묻은 수첩이 그의 안주머니에서 불쑥 튕겨 나왔다. 한 녀석이 잽싸게 펼쳐보더니 치켜들고 외쳐댄다.
“성자는 영철이 각시란다.”
“성자는 영철이 각시란다.”
몰려든 아이들은 영철이 앞을 막으며 럭비공 돌리듯 수첩을 돌려 본다. 거기엔 우리 반 여학생들의 이름이 번호순으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성자의 이름 옆엔 ‘내 각시’라고 덩그렇게 써 놓았다.
‘아, 이럴 수가’
난 순간 허방에 ‘풍덩’ 빠지는 감회를 느꼈다. 영철이에게 선수先手를 빼앗긴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여러 번 쓰고 싶었는데 미처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내 마음수첩에 그보다 더 많이 썼는지 모른다.
어디 영철이 뿐이겠는가? 그녀는 우리들 모두의 부러움이었는데. 예쁘겠다, 공부 잘하겠다, 성격 좋겠다, 빠진 것 찾기가 힘든 흠모의 대상이었다.
막은 내리고 나만의 그녀가 아님을 확인한 그로부터 무수한 날들이 지나갔다.
그래도 내 수첩엔 그녀의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다. 지울수록 더욱 진해진다. 고희가 한 고개 너머인데 이젠 놓아주련만.
억겁의 세월이 곱쳐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성자의 이름. 누가 뭐래도 그녀는 영원한 내 각시다.
멀리 뵈는 고향 하늘엔 예처럼 조개구름이 잔잔히 피어오르고 있다.
-지지 않는 꽃
괴알 띠 움켜잡고
씨름판을 벌렸는데
무릎이 깨어지고 풀 멍이 시퍼래도
천하가 내 세상이라 마냥 좋아 했었지
클로버 꽃시계를 두 팔에 겹겹 차고
번갈아 굽어보며 뛰놀 던 동네 고샅
그립다 내 어린 시절 다시오면 어떠리
콩밭 무 솎아다가 응치게 비벼먹고
먹새우 훑어다가 시래기국 끓인다면
그 맛이 천하일미라 잊지 못할 그 시절
뱀장어 음지 놀던 그 개울 흔적 없고
쭉 뻗은 신작로에 나만 홀로 오뚝 서
저 촌벽 그리운 얼굴
내 너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