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준 식 시인·작사가
지루한 장마가 끝나나 싶더니 연일 폭염에 열대야다. 아내는 아이들의 찬거리를 챙겨 상경하고 나는 요통에 붙들리어 지킴이 신세가 되었다. 벌써 달포를 넘어서건만 놓아주질 않는다.
오늘도 둥그래미가 되어 허리를 끌며 방안을 쓸고 다니는데 번득 뇌리를 스치는 게 있다. 재직 중에 바쁘다며 무작정 미뤄두었던 사진더미가 생각난 것이다.
문갑을 열자 봇물처럼 왕창 밀려온다. 먼저 영역별로 대분류를 하고 그 다음 시간대별로 정리하기로 했다. 아롱다롱 담긴 정에 만감이 교차한다. 재미가 쏠쏠하다.
- 응, 그때 그랬었지!
- 어? 그랬었나!
-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그간 소원했던 귀한 만남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한장 한장 어루는데 불쑥 쏘아보는 사진이 있었다. 결혼사진이다. 모두들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데 유독 이 사진만 불그스름하게 변색되어가고 있다. 인화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은 게다.
볼 때마다 사진사가 야속하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늙어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하다.
육십년대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아내 옆에서 주먹을 야무지게 쥐고 서 있는 모습이 언제 보아도 제법 당차다. 자신감에 넘친 자신의 모습에 취한 순간 곁에 서 있는 아내가 나를 찔벅인다. 그때 참 예뻤었다. 얼결에 보쌈당해 어리둥절하는 아내의 눈빛이 애잔다. 내 나이 스물하고 일곱.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음산했다. 마치 나의 삶을 예고라도 하듯이.
그러나 나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함께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가늠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작정 끌었다. 풍파는 있겠지만 돌아가거나 피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장차 당할 역경이며 갈등 번뇌와 애환哀歡도 모른 채 말이다.
아마도 나의 든든한 보루요, 훌륭한 멘토가 되어 줄 당신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넓고도 빤한 길 다 놔두고 산전수전 다 시키며 가시밭길 에움길로만 인도했으니 얼마나 답답하였소. 내민 손길 차마 뿌리치지 못했음을 얼마나 한(恨) 하였소.
돌아보기 역겨운 날들이 주마등처럼 내 앞을 스쳐가오. 남들은 하루에도 깨가 서 말씩 쏟아진다는 신접살림에 철부지 막내 시동생을 비롯하여 다섯을 불러들이고도 모자라 내·외사촌에 친정 피붙이까지 덤으로 더하니 열이 훌쩍 넘었지요. 도시락은 천정에 닿았구요. 그 형편에 뭘 잘했다고 토라져서 던져둬도 주을 이 없을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겠다 들볶던 내 모습이 부끄럽고 우스꽝스럽소. 어찌 낸들 한 치 앞을 예측인들 하였겠소.
그러나 당신은 연약한 몸으로 그 모두를 거느리고 부족한 나의 몫까지 보듬으며 잘도 감당하였으니. 당신은 참으로 당찬 여장부였소.
쇠붙이도 먹어치운다는 그들의 식성 앞에 끼니는 저승사자였고 가난은 반찬이었지요. 어쩌면 그 모두 하나같이 남자였기에 설거지는 물론이려니와 걸레 들고 닦는 자 하나 없으니 당신 손이 열이라도 모자랐지요.
치마꼬리 움켜잡고 칭얼대는 연년생 삼남매의 어리광이며 투정엔 귀 막고 돌아서서 흘린 눈물이 얼마인지 내 이제 조금 알듯하오. 이제야 무딘 가슴을 촉촉이 적셔 내리는구려, 용서하구려.
또한 당신은 유교 전통가문인 우리가정에 보내진 선교사였소. 늦밤에 제사상을 차리고 절하던 가정에 찬송이 넘쳐나게 하였소.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손잡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였소.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당신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당신의 눈물의 기도가 한나의 기도, 모니카의 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아낸 것 아니겠소. 정말로 수고가 많았소.
그 많던 식솔들 이젠 둥지를 떠난 새처럼 훌훌 날아가 제가끔 삶터에서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당신의 위대한 승리에 박수를 보내오.
저기 추수가 끝난 텅 빈 벌에 허허롭게 서 있는 흉물스런 허수아비가 보이네요. 비록 그 같은 우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결코 외롭지 않소. 당신이 내게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남은 날들이 얼마일지 알 순 없지만 잡은 손 놓칠세라 더욱 굳게 잡고 흔들며 보란 듯 살아봅시다. 내가 지치면 당신이 끌어주고 당신이 힘들면 내가 끌어 우리가 처음 소원했던 우리들의 꿈동산을 일구어냅시다. 참고 살아주어 고맙소.
아내의 애잔한 모습이 오늘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아내의 일기장
밤마다 들려오는 이명 잦아 지샌 밤
금잔디 동산 올라 꽃을 따던 꽃처녀
눈물꽃 피인 월광단 펼쳐보는 일기장
회리바람 불던 날 내친 발 돌려 잡고
맞버팀 삭이며 한 켜 한 켜 쌓은 초옥
파랑새 날아들거니 다시 쓰는 일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