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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브레이크
  • 호남매일
  • 등록 2023-08-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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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식 시인·작사가


뿌연 먼지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는 트럭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 뒤를 따라가며 ‘헬로’를 외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6·25 직후 미국은 동경의 나라였다. 그들이 이제 세계를 주물럭거리며 호령하고 있지 않는가?


내 평생에 한번쯤 꼭 보고 싶은 나라. 그 미국을 지금 딛고 섰다. 일행은 삼십여 명. 대부분은 퇴직한 부부이고 나와 몇몇만 싱글이다. 미국의 서부와 동부를 거쳐 캐나다까지 보름간 일정이니 꽤 긴 여정이다.


나라가 크다보니 부산에서 신의주에 상당한 거리를 연일 반복한다. 관광도 좋지만 육신은 혹사다. 끼니가 되면 내남없이 정신없다. 침대에 등이 닿았다 하면 금새 모닝콜이 새벽잠을 깨운다. 늘그막에 이 대장정을 소화해낼지 걱정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마음깃도 곧추세운다.


현지 가이드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쏟아낸다. 이민 초기 우리 동포들의 살아남기 위한 삶의 애환을 들을 때는 찬물을 끼얹듯 숙연함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


생소한 팁 문화에 대하여 꼼꼼히 챙겨준다. 익숙지 못해 애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게다. 오늘이 벌써 나흘째인데 또 짚어준다.


“침대에 원 달러, 식탁에 원 달러 잊지 마세요.” 경 읽듯 하여도 한두 명은 꼭 잊고 만다.


하루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섰다. 썰렁한 분위기에 메뉴도 단출하다. 서비스도 시원치 않다. 불평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끝내 한 분이 소리친다.


“팁 없습니다. 내지 마십시오.”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물론 나 역시 마뜩찮았다.


팁이란? 서비스에 대한 감사의 대가이기 때문에 놓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이드의 설명에도 그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설왕설래했다. 어쨌든 나는 끝까지 실천해 보겠다고 다짐하였다.


딴 생각에 취하여 깜박 잊고 그냥 나왔다. 내 모습을 어찌 봤을까? 허겁지겁 되짚어 뛰어 들어갔다. 남은 몇 분이 나가며 그냥 가란다. 못들은 척 꾸물대다 일 달러를 놓고 나왔다. 그 분에게 민망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튿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어제 저녁을 함께 하였던 분을 만났다. 혼자인 나를 항상 곁에서 챙겨주는 고마운 내외분이다. 반갑게 좇아오더니 일 달러를 건네주며 받으란다. 모두들 그냥 나갔는데 선생님만 놓았기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내 작심에 본의 아닌 차질이 생겨 아쉬웠다. 그분들도 결코 돈이 커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장정에 몸은 지치고 뱃속은 늘 허전하다. 남들은 부부이기에 서로를 잘도 챙긴다. 평소 군것질에 익숙지 못한 나는 웬만하면 참기로 하였다. 그러나 허기는 어쩔 수 없는 법. 간식이 내심 그립기도 하고 식간食間이 무척 길게 느껴진다.


점심은 뷔페였다. 또 그분들과 마주하였다. 생각 외로 메뉴가 풍성하였다. 모두들 화색이 돋는다. 서너 번씩 들락거리며 모처럼의 기회를 만끽한다. 나 역시 놓칠세라 풍성하게 챙겼다. 다 먹기에 부담이 갈 정도다. 과일도 다양하고 질도 좋아 배가 불러도 군침이 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서제서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한다. 빵과 과일로 뺑뺑하게 채운다. 마주한 내외분이 자기들도 넣으면서 또 챙겨준다.


“살 데도 만 맞지 않더라구요, 선생님도 어서 가방에 넣으셔요.”


아니라고 몇 차례 사양을 하였지만 겉 사양임을 용케 알아채고 어서 넣으라고 종용한다.


‘그래도 그렇지’ 하며 머뭇거리는데 “제가 망을 보아드릴 테니 어서 넣으십시오. 어서요. 지금 넣으세요.”


직원들 눈길을 피하여 거듭 채근한다. 얼떨결에 오렌지와 사과를 집어넣었다. 엎질러진 물이 됐고 막은 내렸다. 이 모습 어찌 보였을까? 어글리 코리안.


‘작은 이익을 위하여 인격을 허물지 말라.’고 아이들 앞에서 힘주어 외쳤던 내가 과일 두개에 인격을 팔고만 것이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한을 팔아버린 성경 속의 에서와 다를 바 없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일어설 수도 나갈 용기도 나지 않는다. 문 앞 안내원의 눈이 황소 눈만큼 커 보인다. 모두들 나만 바라보는 것 같다. 황당함에 멍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 분들을 먼저 가라며 길을 내주고 나는 눌러 앉아 과일을 꺼내 먹기 시작하였다. 만삭의 배는 더욱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마음은 새처럼 가벼웠다. 고장 난 양심브레이크가 재가동된 것이다.


무엇을 얻고자 내가 이곳에 왔는가? 다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미국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그 어떤 관광보다 부끄러운 내 모습의 재발견이요 성찰이었다.


정중히 권하는 인품과 고마운 정에 밀려 거절하지 못한 나였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갈 길은 멀다. 우유부단한 자신을 끝내 지켜내진 못한 인격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선택의 기로에서 살짝 숨어버린 내 양심에 채찍을 내린다. 늦게나마 되찾은 양심에 감사하며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되자고 다시 다짐한다.


구름을 벗어난 하늘이 참으로 푸르게 보인다.



- 흔적 -



속마음 가둬 두고 겉마음만 내 보였다


온 길을 둘러보며 흠 없다 펴 보였다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바윗돌의


저 낙관落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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