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준식 시인·작사가
두메산골에 모녀가 살았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침 만삭의 달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둥실 떠오른다. 휘영청 밝은 달은 딸을 자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진 딸은 엄마에게 말을 청했다. “엄마, 달이 참 밝지”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불쑥 대꾸한다.
“미친년, 보름달인 게 밝지. 어서 잠이나 자 이 년아”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그래 참 밝기도 하다. 너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 어서 가정을 꾸려야할 텐데, 네 짝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했으면 좀 좋으련만…
어찌 이 모녀뿐이겠는가? 죽자고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못 살겠다고 머뭇거릴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도 보름달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부장적 독주와 헛된 출력만 일삼던 자신의 과오를 모르고 말이다. 들어보면 그만한 이유가 절절히 있는데 통채로 무시한 것이다.
초등학교교육과정에 공명실험이 있다. 두 개의 소리굽쇠를 마주 놓고 한쪽을 쳤을 때 주파수가 같은 경우에는 다른 쪽에서 ‘윙’하고 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주파수, 삶의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소통은 막히고 대화가 단절됨은 당연하다. 소통은 말과 같이 쉬운 게 아니다. 서로의 높이가 같아야 한다. 높낮이를 맞추어야 성립된다. 그렇지 않으면 막힌 담이 트일 리 없다. 그렇지 않으면 감성이 이입된 3차 4차의 깊이 있는 대화나 이심전심의 단계는 엄두도 못 낸다.
독선과 독주는 비극의 주범이다. 내 방송만 하지 말고 그러려니 남의 방송도 들어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들음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동시에 소통의 일번지요 동행의 첫발인 게다. 아내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고 아닐지라도 들음의 안테나를 더욱 높이높이 뽑아 올릴 일이다.
오늘따라 밝아 보이는 보름달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연리지
서로를 챙긴다며 반쪽이 다 젖었다
한 몸을 둘로 나눈 사랑의 증표거니
비바람 몹시 불던 날 마주보며 웃었다
쪽 이불 함께 덥고 깍지 낀 청실홍실
밀어주며 끌어주며 에움길로 예 왔거니
막고개 높다고 한들 덧정으로 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