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준 식 시인·작사가
몇년 전 초봄에 캐나다와 미국을 다녀왔다. 퀘백에서 몬트리올을 지나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섶 초록융단을 수놓은 샛노란 민들레가 밤하늘에 흩뿌린 잔별 같았다.
“참 곱구나”했더니 남으로 접어들자 금새 꽃은 졌고 꽃대궁 그 윗자리엔 하얀 씨앗머리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참으로 고고하였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옆의 동료를 찔벅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냐고 묻고는 나의 바람을 말했다. “민들레처럼 아름답게 살다가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입바람을 ‘휙’ 불어 하얀 씨앗머리를 단번에 날려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내 앞엔 뇌경색으로 몸을 부린 어머니가 가녀린 모습으로 누워 계신다. 벌써 삼백예순날이 훌쩍 넘어섰다. 수면제와 진통제로 버티고 계신다. 굽은 등은 욕창으로 무너진 지 오래며 피골이 상접하였다.
밥이 죽으로 다시 미음으로, 이제는 그것도 힘겹게 링거주사로 생을 이어가신다. 사지는 바늘자국으로 온통 성한 곳이 없다.
삶이 정지되던 그 순간부터 어머니의 삶은 역회전이다. 창밖의 쪽빛 하늘과 병실의 하얀 천장은 스크린이 되었다.
뒤란의 낡은 영상을 거기에 펼쳤다가 하나하나 눈물로 거두신다. 천 날 같은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멀고 먼 내림길. 그 역은 어디쯤일까?
희미한 불빛 따라 지척길도 멀다 하며 한 계단 또 한 계단 힘들게 내려가시는 어머니를 강 건너 불 보듯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물음 못지않게 마침표를 어떻게 찍느냐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고종명(考終命), 그것이 왜 오복 중 하나인지를 알 것 같다.
초록융단에 수를 놓은 샛노란 민들레가 보고 싶다. 그리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하얀 씨앗머리도.
-화장터-
정 끊어 버린 자리
짐 벗어 놓은 자리
미움도 그리움도 욕정도 내려놓고
어허라, 여울진 둔덕 뒤돌아 보는 자리
혼불은 연기되어 왔던 길 돌아가고
꺼풀은 촬토 되어 제 자리 찾아가니
단말마, 이것이 인생
뉘 아니라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