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선운사 길을 걸었다. 선운사 하면 몇 편의 시가 생각난다.
서정주의 ‘이 가을날 나는 무엇에 물들고’ 시가 머리에 맴돌고, 김용택의 글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시 귀를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아직도 늦여름의 습한 기운에 온몸이 지친다.
도솔암에까지 걷다 지쳐서 내려오는 길에 선운사 절 내를 돌아보았다. 선운사 도솔암까지 걷느라 선운사 경내를 돌아 보는 것이 오랜만이다. 너른 마당에 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선운사 마당에 백일홍 꽃잎이 떨어져 있다. 떨어지며 다시 피어오른 백일홍꽃도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을 것을 보니 벼 수확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올처럼 가을을 기다려 본 적도 없다. 9월이 되어도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어 아침저녁으로 바람만 불어도 너무 반갑고 좋다.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담장의 호박넝쿨, 붉은 고추, 들깨도 잎을 떨구고 씨앗을 맺고 있다. 그 무덥던 여름 속에서 소중한 열매를 지켜온 들판의 곡식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가져 본다.
가을이 왔다. 그 무더웠던 여름을 밀어내고 바람을 안고 가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푸른 하늘 바라보며 풍요로운 마음 가득하다. 들판에서 가을 노래하는 풀들도 드디어 꽃을 피웠다. 개울가의 고마리는 수줍은 미소를 날리며 길 가는 사람에게 손짓한다. 그 옆에 살포시 고개를 내민 여귀도 가을 소식을 전해준다.
드디어 가을이 왔다. 가을과 함께 추석도 다가온다. 작은 것이라도 나눔이 필요한 시기이다.
O는 지인이 보내준 밤을 20명과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한 명의 넉넉한 나눔이 많은 이에게 기쁨을 안겨준 것이다. 드디어 가을이 오니 여기저기 여유로운 소식이 날아온다.
가을 풍경을 생각하니 전원일기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전원일기 방송이 끝난 지 21년 만에 출연자들이 다시 모였다. 21년을 넘게 했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사연도 많다.
김민재역을 맡았던 최불암이 방송 출연을 하였다. 그는 40세에 농부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자신이 어떻게 촌부의 역할을 해낼까 싶어 걱정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최불암은 벼가 익은 들판에 서서 어떻게 이 역할을 해낼까 고민을 하던 중에 생각난 그림이 장욱진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1951년 전쟁 중이었던 시절, 장욱진은 양복을 입고 가방과 우산을 들고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을 걷는다. 화가의 뒤를 따르는 강아지의 발걸음이 버거워 보인다. 들판 뒤로 까마귀가 날아가고 있는 그림을 그린 시기는 암울한 시기로 어려운 시절과 반대되는 그림 속에서 화가로서의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최불암은 농부 김민재 역을 장욱진의 열정을 담는다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전원일기 부부 역할을 했던 최불암과 김혜자가 만나 그 시절을 이야기를 나눈다. 부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의 근대문화가 떠오른다.
시골 입구에 들어서면 빨래터가 있었고, 마을 앞에는 정자가 있어 느티나무 아래에서 마을 어르신들이 장기를 둔다. 전원일기 드라마를 생각하며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른다. 지금도 시골길을 가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정감 있는 풍경은 사라져 가는 것 같다.
현대를 살아가는 알파세대는 아름다웠던 시골의 풍경을 드라마, 영화, 그림책에서나 만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을이 왔다. 들판을 지나가니 들판에 곡식들이 고개를 숙이고 마을 산책길에 마로니에 잎도 떨어지고 어떻게든 가을이 온 것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9월까지 지속 되어 가을이 올까? 걱정했는데 가을이 왔다. 그렇게 추석도 왔다.
어릴 적 추석 풍경을 그리며 가을 들판을 걸어본다. 벼도 고개를 숙였다. 추석을 생각하면 풍성해진다. 올여름 장맛비로 수확의 양은 줄었지만, 들판 가득한 시골 풍경을 보니 마음이 평안해진다.
선운사 산책길에 어린 억새가 올라왔다. 길을 걷다 보니 후두둑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아보니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다. 떽떼굴 소리에 다람쥐도 쪼르르 달음질하는 가을이 우리 곁으로 왔다.
그 무더웠던 바람을 밀고 안, 밖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모든 이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