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준 식 시인·작사가
오래도록 사랑을 받았던 ‘TV는 사랑을 싣고’는 나 같은 교육자에게는 보람과 자부심 그리고 긍지를 심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비록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초대받지는 못했지만 어느 제자 누군가는 지금 어딘가에서 나를 기릴 것이라는 착각에 젖는다. 프로가 끝나가면서 나와 저분들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다. 부러움과 그러지 못했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초대받은 은사님! 훌륭한 분이시다. 분명히 뭔가 다른 그 분들만의 교육철학과 방법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남보다 많이 가르쳤다고? 남보다 잘 가르쳤다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잊지 못하고 감사하는 제자의 마음도 눈에 보일 듯하다. 스치는 짧은 만남일망정 천 날의 만남처럼 감동과 감화를 주고 가슴을 건드려야한다.
아파할 때 아파하며 어루만져주고 기뻐할 때 눈높이를 맞춰 함께 기뻐해 주고 잘못했을 때 ‘이것은 이러하기 때문에 아니다.’ 라고 분명히 짚어주고 따끔한 회초리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호 섹스피어는 “칭찬 받을 일을 했을 때 칭찬하지 않음은 칭찬 받은 행동 그 자체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결정적 시기를 놓치지 않고 짚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이다.
40년 교단생활에서 공평애公平愛 만을 고집하다 뒤 늦게 터득한 것이 하나 있다.
교육은 공평애를 부르짖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편애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많이 준다고 감사하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주더라도 나만 주었을 때 더 감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순된 결론이지만 편애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인기영합이나 기회주의적 비양심적인 교사가 되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똑 같이 주되 나만 주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편애 같은 공평애를 말한다.
교육자적인 양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하나에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마지막 수업을 하듯 뜨겁게 전력투구해야 하는 것이다.
존경받는 스승상이란? 지위나 명예를 떠나서 이름 없이 피고 지는 들꽃처럼 이름 모를 전장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죽어 가는 무명용사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소임을 다하는 교사일 것이다.
몇 년을 교단에 있었고 제자가 몇 명이다. 라는 말은 참 교육의 의미를 식상하게 하는 말이다.
교육은 숫자가 아니라 단 한 명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다. 페스탈로지 선생님처럼 깨어진 유리조각부터 먼저 주어야 한다.
톰슨이나 하디선생님처럼 제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한다.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제자가 있다면 무릎을 꿇어야겠다. 좋은 스승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해야겠다.
교육의 맹점은 모호성, 애매성, 불명확성에 있다고 했다.
적당히 가르쳐도 곧 바로 흠이 드러나지 않는다. 잘못 가르쳤다고 감옥에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주하면 안 된다.
창가의 시들한 분재가 나를 부른다. 어서 물을 주어야겠다.
- 옹 고 집 -
둘러봐도 인적 없는
외진 심사미
거추장스런 옷일랑
아예 벗어던지고
푯말 하나 들고서
우뚝 선 이정표
널 위해 여기 있으리
비바람 눈보라도
내 사명 뉘 꺾으랴
기쁨도 슬픔도 홀로 새기고
긴 세월 온갖 시련
맨 몸으로 견디면서
나 여기 있으리
누군가 해야 할 일
너, 나 따져 무엇 하리
나 하나 죽어지면
모두 사는 걸
동서남북 가름하여
영원히
나 여기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