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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 호남매일
  • 등록 2024-02-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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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아내의 몸놀림이 바빠졌다. 객지의 자식들이 온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부엌을 바삐 들락거린다. 나 역시 하던 일을 속히 마무리하고 도와주려니 매 바쁜 짬이었다.


그때 갑자기 ‘짝’하는 손뼉 소리와 함께 아내의 헛웃음 소리가 들린다. 탄식에 가깝다.


“어휴 내가 미쳤어, 이게 무슨 일이 디야.”


혼잣말이 예사롭지 않아 나는 펜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 무어가 그렇게 재밌어?”


“나 참, 이것 좀 봐. 별꼴 다 보겠네.”


아무리 끓여도 엉기질 않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미숫가루였단다.


“그걸 모르고 여적 끊였으니 아휴, 내가 미쳤지 미쳐.”


얼마 전 처남이 등산길에서 손수 주은 도토리며 상수리를 빻아서 가져왔다. 귀한 것을 고마워하며 귀하게 먹어야겠다고 아껴두었던 모양이다. 문득 그게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정성을 다한 결과가 바로 이거다.


칠순을 목전에 둔 아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어쩜 아이 같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그 황당함에 나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웃어야 할 것인가?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슬퍼해야 할 일인가? 나는 애써 빙긋이 웃으며 아내의 멋쩍은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랴, 가루농약을 밀가루로 알고 부침개를 해 먹고 어찌 됐다느니, 농약을 음료수인 줄 알고 마시어 어찌 됐다느니, 하는 방송을 가끔씩 듣고 그저 쓴웃음으로 지나쳤는데, 그것이 ‘너는 예외일까 보냐.’ 하며 내 앞의 현실로 훌쩍 다가온 것이다.


건강에 좋다는 것만을 골라 모처럼 마련한 미숫가루다. 그것이 아깝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나절 동안 북새를 떨던 아내의 수고가 짠하고 측은하였다. 나는 가만히 아내를 당겨 안았다. 곱고 예지롭던 아내가 어느새 푼푼한 여느 할망구가 되어있었다.


밀거니 당기거니 손잡고 달려온 우리들 삶이 ‘벌써 예 왔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 한 자락을 적신다.



-연리지-


금간 자리 상감하며 쇠밧줄로 동여맸다


한 세월 훑고 간 자리 보톡스로 채우랴


버려도 주울 리 없는 손때 묻은 내 뚝배기



희로애락 갖은 양념 소재 되어 걸찬 차림


당신의 그 눈물이 내 삶의 간이었나


뼈마디 우려낸 국물 내 입맛에 딱이오


/류준식 시인·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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