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개울이 있는 산책길이 있어 밤마실 삼아 걷기 운동을 한다. 오동나무꽃이 지고 자귀나무꽃이 피는 걸 보니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물길을 따라 산책길을 한참을 걷다 보면 텃밭이 있다. 아파트 주민들이 경작하는 텃밭에서 작물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텃밭에는 갖가지의 작물이 자라고 있다. 잎이 시들어지는 감자를 보니 이제 하지가 얼마 남지 않아 감자 수확해야 한다. 상추는 뜯어서 먹을 만큼 먹어서인지 꽃대가 쭉 올라와 있으며, 양파와 마늘 수확이 끝난 자리에 고구마 순도 잘 자라 자리를 잡았다.
도시민은 마트에서 만나는 갖가지의 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며, 지인과 텃밭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경주에 사는 지인이 모처럼 얼굴 보자는 연락이 왔다. 마침 주말 일정이 비어 있어 큰마음 먹고 경주로 길을 나섰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 경주 안강에 있는 독락당에 도착하였다. 독락당은 희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양동마을이 있는 본가에 가지 않고 거처한 곳으로 독락당이라 이름 지었다.
독락당 계정에서 문을 열면 숲과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독락당 안쪽에 있는 계정까지 들어가는 과정은 복잡해 어디로 깔까 주춤하다 이르게 된 계정 마루에 서면 숲과 계곡이 만나는 집을 보면서 이런 낙원이 있을까 싶다.
독락당은 안채, 사랑채, 별당, 사당, 공수간 등을 갖춘 살림집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양반가와 다르게 지어졌다. 독락당과 공수간 사이 골목은 토담으로 이어져 외부와 차단된 독락정은 숲과 계곡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한 자연 친화적인 건축이다.
독락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계정이다. 집 구조를 보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있으나 계정에서 숲과 계곡을 만나 비움에서 얻어지는 학자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작년 겨울에 독락당을 방문하였다. 겨울바람이 따스한 날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을 걷는 숲길이 너무 좋아 봄이면 다시 한번 와야지 했는데 봄이 가고 여름의 길목에서 다시 만나본 독락당 계곡에는 더위에 소풍을 나온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독락당 계곡에서 고요한 시간을 기대했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독락당에서 옥산서원까지 숲길을 걸었다.
희재 이언적은 숲길을 걸으면서 사색의 시간을 갖지 않았나 싶다. 불현듯 강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길을 걸었던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생각이 났다.
소나기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인지 바람불어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숲길을 자박자박 걸어 옥산서원 세심대에 이르렀다. 세심대 골짜기에서 물장구치며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의 해 맑은 모습을 보면서 자연이 주는 감사함을 느껴본다.
옥산서원에서 독락당까지 돌아오는 길은 마을 길을 택하였다. 시골집 마당에는 갖가지의 작물이 자라고 있다. 시골집 담장에 앵두가 익어 붉은빛이 돌아 길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붉은 앵두에 잠시 길을 멈추어 텃밭을 바라보니 옥수수도 훌쩍 자라 있으며, 토마토도 붉게 익어가고 호두나무에는 호두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비 올 소식에 한낮인데도 자옥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길에서 만나는 들풀까지도 이야기 소재가 되는 산책길이었다.
최근, 숨어 있는 정자를 찾는 즐거움이 좋다. 내 고장에도 정자가 많이 있다. 광주 근처만 하더라도 명옥헌,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환벽당, 면앙정, 풍암정 등 시대에 맞는 정서와 감각으로 지어진 정자를 보면 학문을 닦는 선비의 홀로 있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 정자에서 만나는 여름은 더위를 피해갈 수 있으며 지친 심신을 달래는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독락당에서 옥산서원까지 숲길을 걷고, 옥산서원에서 독락당까지 길을 걸으며 그 지역에서 문화를 공부한 지인의 도움으로 옥산서원 계곡 앞 하마비(下馬碑: 말에서 내려 걸어감으로써 예의를 표시하라는 문구를 새겨서 궐문)를 발견해보고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우리의 옛 문화를 의미 있게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인은 경주 감포 텃밭에서 갖가지의 상추와 처음 수확한 오이도 품에 안겨 주었다. 먼 여정에 심신이 충만했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 던 시기다. 무더위가 한창인 시기에는 옛 선비들이 학문과 놀이를 즐겼던 고택과 정자를 찾아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